변화 1,2
2017.01.28
변화 1
날카로운 칼이 얇은 소년의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여린 살 틈으로 베어 드는 칼은 손쉽게 피로 젖어들어갔고 꿀렁대며 핏덩이가 주루룩 쏟아졌다. 이따금 질척대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튼,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진득한 소음이었다. 호원은 귀를 틀어 막고픈 충동을 느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시야를 찾았다. 아이의 작은 깨끗한 옷이 피로 흠뻑 젖었고 풀썩 주저앉은 가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목을 깔끔하게 관통한 칼은 축 처진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더라. 수많은 동백꽃이 아이의 몸에 피워져 흘러내렸다. 낡은 쇠 향기가 호원의 코를 찔렀다.
막연히 들던 하나의 생각. 아, 가람군이라 어색하게 부르던 호칭을 제대로 부르기 전에 너는 꽃다운 모습으로 꽃을 안고 꽃처럼 떠났구나.
나는 또 미련하게 그걸 지켜만 보는구나.
무서웠다. 간호사를 목표로 하는 주제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다리는 덜덜 떨렸고, 움직이기 힘들었다. 목구멍에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식은땀이 절로 났고 눈앞이 흐렸다. 무수히 흘러내리는 핏덩이가, 살을 훤히 드러내는 저 깊은 부위가, 그 못된 곳을 스스로 찌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이때까지의 대화를 떠올렸다. 가람은 한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내다 보았다. 축 처진 몸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다. 밝고 천사 같던 눈 꼬리가, 그 맑던 아이의 눈동자가, 더 쓰다듬어도 된다던 높은 톤의 목소리 하나 하나 이제 먼 허공으로 흩어져 먼지가 되었다.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갔으면, 의사가 근처에 있더라면, 내가 좀 더 착실하게 간호학을 배워왔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
'넌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잖아. 넌 정말로 운이 좋아.'
맞아.
그 무수한 붉은 꽃잎들을 내다 보며
내가 느꼈던 건 공포와 슬픔을 뛰어넘는 안도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는 순간 다시 한 번 혐오감이 떠오른다.
아, 역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며.
이런 순간에조차 죽지 않는 나 자신의 운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웃었다.
이건 그저 옛날 이야기.
어린 첫 동생이 태어나고 밖에 혼자 놀러 나갔을 때의 일이다. 호원에겐 단짝이 있었다. 아이는 소극적인 호원을 데리고 놀이터로 데리고 가 종종 놀았다. 축구나 땅따먹기, 이따금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놀고 또 놀다가 집까지 전력질주를 한다. 누가 더 빠른지 시합이야! 아이가 먼저 권한 일이었다. 지지 않겠다며 힘겨루기를 하며 달렸다.
마지막 내기는 호원의 패배이자 승리였다. 종착지는 횡단보도였고, 호원이 주저 앉은 너머로 아이는 온갖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뺑소니였다. 허겁지겁 주변 어른들이 구급차와 경찰을 불렀지만 뺑소니는 찾기 어려웠다. 단숨에 치여 날아가버린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그 뒤를 더디게 달려가던 호원은 간신히 목숨을 면했다. 그 날 이후로 호원은 놀이터에 갈 수 없었다. 대신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검은색 옷을 입으며 아이가 있는 곳으로 놀러갔다. 마지막 놀이였다.
"정말 호원군은 운이 좋았구나-"
"넌 무사해서 다행이야. 신이 지켜봐 주셨구나."
"운이 좋았어. 둘다 안 죽은 게 어디야?"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너는 정말 운이 좋았다며. 웃으며 한 명 한 명씩 다가와 어깨나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진득한 괴물의 손 같았다. 목소리가 거북했다. 시선 너머로 어딘가 미운 듯이 바라보던 아이의 부모의 눈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쉬운 일이더라. 그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죽였다. 시야가 흐릿했다. 조금 울었던 걸지도 모른다.
친구의 슬픔보다 자신이 살았다는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는 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라.
꿈을 꿨다. 누군가 쫓아왔다. 뒤를 돌아보면 그 아이가 있었다. 전에는 나보다 늦게 달리더니만. 낄낄낄 소름끼치는 웃는 소리가 세상을 덮쳤다. 눈앞이 번쩍거렸고, 코앞에 달려던 까만 차를 피할 새도 없이 호원은 차에 부딪혀 날아갔다. 어쩔 때는 얼굴부터 때려 뼈가 박살이 났다. 어쩔 때는 몸을 짓눌러 온 근육과 살이 터져버렸다. 어쩔 땐 다리부터 잘라 몸을 분절시켰다. 그것을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하다가 마지막엔 차가운 도로 위에 엎어졌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저 차갑고 무섭다. 마주 편엔 아이가 차에 짓눌려진 상태로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운이 좋았네.
다음엔 누가 더 좋을까.
현실 같은 빌어먹을 꿈에서 일어나면 이상하리만큼 안정된 방 안에서 깨어났다. 막 태어난 어린 남동생이 허기가 져 울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왔다. 작은 발로 이불을 걷어 차 벌떡 일어난 호원은 실수로 발을 헛디뎌 그대로 쾅! 바닥에 엎어졌다. 큰 소리에 놀란 동생이 울음소리를 높였고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오노 부모님이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욱신대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호원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운이-!
운이 안 좋았어-!
"...정말 안 좋았어."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입술을 오물댔다.
호원이 정신을 차리면 붉게 물들던 세상은 어느새 한눈에 변했다.
소년은 살았다. 소년은 아이가 아니였다. 붉게 물든 피가 서서히 공기와 함께 방울로 머금으며 사라지는 듯 하더니만 그것은 곧 기이한 요기를 뿜어내며 새 옷자락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또 볼 수 있긴 한 걸까. 죽음을 끝으로 생명이 탄생하더라. 호원은 그 기이한 광경을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죽음에서 탄생한 존재의 자태에 몇몇은 깊은 안도감을 토해냈고, 몇몇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그렇게 익숙하게-
태연하게 이어지는 죽음 뒤의 탄생이-
자신의 안도감에
환멸감을 느꼈다.
'..정신 차려....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모두가 저렇게 웃고 있잖아. 다 해피엔딩인 거잖아. 약간의 해프닝에 약간의 서프라이즈. 이곳이 뭐 그렇지. 안 그래? 호원아, 너는 원래 둔하고 멍청이고 미련한 놈이니 이렇게 속임당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니까....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칼의 끝 부분엔 옅은 동백꽃 잎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진득하게 말라붙은 꽃잎 끝에 쓴 냄새가 났다. 그것을 소중하게 쥔 호원은 날카로운 칼날이 손끝을 파고들어 다시 한 번 피로 적셨다. 이 존재가, 이 밉살스러운 칼 하나가 호원의 마음을 가득 쑤셔 박았다.
그러니까, 가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죽음 뒤에 태어난 존재의 분위기에선 가람을 찾기란 어려웠다. 피는 여전히 제 손 안에 흥건했고, 혼란스러움만 가득했다.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호원에겐 선택권이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등을 떠미는 손들만 있었다. 그때와 같았다. 아이가 없어진 어린 호원의 곁을 등뒤로 많은 자들이 억지로 떠밀었다. 결국 이승이나 생사구나 별 다를 게 없구나. 웃음이 나왔다.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웃던 입 꼬리를 내렸다. 버릇마냥 반지를 만지작댔다. 이따금 받은 푸른빛 팔찌와 보호석도 만졌다.
더 이상 미련따윈 갖지 말자.
기대하지도 마. 절망하지도 마.
딱딱하게 굳은 입가는 더 이상 벌어지지도 않았다. 끌어안던 칼을 손쉽게 바닥에 떨군 후 짓밟았다. 나머진 알아서 사자님들이 치워줄 것이다. 덤덤한 표정으로 호원은 걸음을 내딛었다. 방 안에 모셔둔 꽃과 월령석이 걱정됐다.
희망을 가지지도 마.
결국 흘러갈 대로 흘러갈 것.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걸음을 내딛어 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운없는 놈으로 살아가서
얼른 좀 죽어. 제발.
아이가 말했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변화 2
많은 일이 있었다.
축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건 기이한 현상이었다. 둔하디 둔한 호원이라 해도 축시가 가까워지면 저절로 목 뒤가 소름이 돋는다거나 이상하게 추워졌다. 몇 요괴와 사자는 이를 악한 귀가 영혼을 공격하려는 것이라며 말했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지나자마자 귀로부터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운이 좋게 아무 일도 없었지만 어떤 날은 돈을 뺏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공격을 받아 팔찌에 금이 가기도 했다.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 현상이었지만 이내 그 생각도 곧 사그라들었다. 확실히 귀들이나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붙어 두렵기는 했으나 그와 반대로 생사구가 나쁘지 않은 곳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인간을 선호하는 요괴들은 상냥하게 이 세계의 룰을 설명해주었고, 같이 조사를 나가는 내내에도 호원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요괴의 친구가 생기기도 하였고 까마귀 요괴에겐 귀하다는 보석과 어여쁜 유리구슬도 받아왔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에게 생불꽃을 직접 받기까지 했다.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책을 빌려 받기도 했다. 삼도천 근처 꽃밭에 작은 나무도 심었다. 즐거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쁘지 않다. 솔직히 즐거웠다. 현실보다도 더 밝게 웃을 수 있었고 귀한 인연을 만났다.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아? 누군가가 호원의 귀에 속삭인 것 같았다. 마치 하나의 유혹마냥 들려왔다.
'그래, 어쩌면 그 곳보다도 더 좋을 지도 모르는데!'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안일한 생각을 했다.
스며든 곳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뿐이었다. 악몽은 늘 호원의 곁에 있었고, 아이는 여전히 남자의 옷자락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또한 작은 손을 뿌리칠 생각은 없다. 정말로 안일했다. 다시금 자각한 호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 세계는 늘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거무스름하게 안개가 껴있어 시야가 흐릴 때가 많다. 하늘에 태양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보기가 어렵다. 차가운 공기는 가끔씩 몸이 서릴 정도로 차가웠다. 집들은 호원이 보기 어려운 옛 시대와 현 시대의 건물들이 이질적으로 섞였다. 꽃들과 나무는 생소했다. 이곳의 음식들이라곤 손대본 적도 없었다.
그래,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 앉은 호원은 시선을 멀리해 저편의 삼도천을 응시했다. 오늘은 배가 한두 척밖에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진 강을 다 채우고도 남을 수였었는데. 그렇게 남자가 눈치 채기도 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세계.
그들에게도 호원에게도
차호원은 이 세계의 이방자였다.
'돌아가자.'
돌아가야지. 계속 질질 끌어봤자 호원은 이 세계의 주민이 될 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탈탈 흙이 묻은 다리를 털어냈다. 뻐근한 몸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면 툭, 발에 걸리는 아름다운 월석을 발견하고 작게 웃었다. 화분에 고이 묻어둔 꽃을 품에 안고 월령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손에 쥐었다. 무거웠던 발걸음을 하나 둘씩 떼어내고 앞으로 향했다.
변함없이 안개가 가욱하고 차가운 세상이었다.
가벼이 즐겼던 멈춰버린 시간.
따스한 햇볕이 보고 싶었다.
시간이 없어 많은 로그를 못쓴게 한이다,,,,,
진짜 오랜만에 너무 즐거운 커뮤를 뛰어서 좋았다. 2주 너무 짧아... ㅠㅠㅠㅠㅠ
이제 무슨 커뮤를 또 즐겁게 어떻게 뛰냐....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