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갈매 2017. 11. 29. 22:06



호원은 동성애자가 아니다. 첫사랑은 초등학교 때 리코더를 가르쳐주시던 음악 선생님이었다. 리코더 한 음 한 음을 되짚으며 가르쳐주는 그녀의 상냥한 손길이 좋았던 것 같다. 호원이 졸업하고 나서 자연스레 마음속에 잊어지게 됐지만. 두 번째 짝사랑은 중학교 때 같은 방과후 수업을 듣게 된 이름 모를 여자아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소녀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녀는 단발이었고, 체격이 왜소했던 호원보다도 더 아담했다. 공부를 하는 내내 펜을 끄적이는 소녀의 작은 손이 좋았다. 당시엔 말을 걸 용기가 없어 수업을 듣는 내내 소녀의 뒷모습만 보기만 했던 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고백 따윈 무리였다. 졸업할 때까지 말 한 번 붙이지 못한 소녀를 짝사랑으로 남겨두고 고등학교로 올라왔다.


그리고 세 번째. 너 땀범벅이야. 주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호원에게 다가왔다. 한창 작업 중이었던 모양이다. 주명의 곁에 몇 개의 도자기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호원은 주변의 도자기에게 시선을 옮기다가도 다가온 주명에게 시선을 옮겼다. 날카로운 눈썰미에 감춰진 상냥한 붉은 눈동자. 굵은 이목구비에 힘 들어간 어깨. 그에 반해... 둘러 입은 앞치마는 가운데에 노랑 병아리가 박혀있는 건 상당히 귀엽다. 두 달 전에 호원이 선물한 물건이었다. 디자인이 이게 뭐라며 투덜거렸지만 꼬박꼬박 입는 걸 보면 다행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뭐 하러 왔어. 팔짱까지 끼며 호원을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은 어딘가 아니꼬워 보인다. 어, 엄.. 그러니까.. 호원은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가는 길에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할까. 물론, 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 그러니까- 혹시 수건 있으면 하나 빌려달라우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호원의 얼굴에 차가운 수건이 직격했다. 차가워! 니가 좀 챙겨라, 내가 엄마냐? 헤헤헤. 멍청하게 웃지 좀 말고. 물에 젖은 수건을 얼굴에 느릿하게 문지르며 호원은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흘렸다. 그거 다 닦으면 마른 수건 받아. 주명이 다시 구석에 있던 수건을 던졌다. 이번엔 물기 한 번 없는 뽀송뽀송한 수건이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호원이 오면 매번 두 개의 수건을 준비해준다. 젖은 수건과 마른 수건. 오직 호원을 위한. 아니면서도 챙겨주는 그의 배려심이 좋았다.


그래, 세 번째. 호원이 마른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는 사이 주명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능숙하게 점토덩이를 만지다보면 어느새 새로운 작품이 그 앞에 만들어져 있었다. 뭐든지 만들어내는 손. 닦아내던 움직임을 멈추고 주명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웅, 발판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주명의 손이 도자기의 끝자락을 다듬기 시작한다. 두툼하고, 커다랗고 매끄러운 그의 손가락은 마치 마법같다. 그 손으로 뭐든지 만들 수 있어. 오직 도자기에만 집중한 주명의 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호원은 먹먹한 가슴을 움켜잡았다.


두 번이나 말하지만 호원은 동성애자는 아니다. 좋아하던 사람이 우연치 않게 남자였을 뿐이지.


물론 호원이 주명을 좋아한다고 깨닫게 되었을 땐 한동안 매일매일이 세상이 하얗게 질려 보일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우정인 제 마음이 단순히 오해로 변질된 것뿐이라고 부정했다. 부러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면 시선을 옮기기도 했고, 텔레비전의 여자 아이돌을 보며 생각을 떨쳐 보려고도 했다. 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쉽게 떨궈낼 순 없는 것이더라.


호원은 농구부에서 나름 부원들에게 사랑받는 입장이었다. 실수도 잦고 부상도 많아 불운의 케이스라 놀림을 받기도 했
으나 그런 후배이자 또는 선배, 혹은 동기가 딱해 보였던 모양인지 부원들은 호원을 참 잘 챙겼다. 호원도 그런 부원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연정은 아니었다. 차이점을 알게 된 건 며칠 후 타학교와의 연습시합으로부터였다. 결정타는 호원의 마무리 3점슛이었다.


잘했어 원아! 평소엔 엄하지만 실력만큼은 탁월한 주장에게서 얻은 칭찬이었다. 주장의 커다란 손이 호원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기뻤다. 연습시합이지만 제 슛 덕에 빗어진 승리였다. 뜨거운 손이 몇 번이나 호원의 머리칼을 쓸어 머리는 엉망이 됐지만 호원은 몇 번이나 실없게 웃었다. 존경하던 사람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건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꽤 잘 하던데, 안 넘어지고. 그리고 그 시합은 남몰래 지켜본 주명이 함께 있었다. 어, 언제 왔었어..? 얼마 안 됐어. 대회에서도 그렇게 좀 해봐라. 주명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털한 웃음이, 자연스럽게 입가가 벌어진 미소가 끝내주게 멋있었다. 호원이 그 미소에 시선이 팔린 사이 헝클어진 머리 위로 주명의 손이 닿았다. 주명의 손엔 옅은 풀내음과 흙냄새가 났다. 그리고 이따금, 시큼한 물감 냄새도 났다. 미술과 거리가 먼 호원에게 있어 오직 주명에게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고. 쓰다듬는 손길은 주장보다는 약하지만 힘 있고 부드러운 손길. 주명만이 해줄 수 있는 손길이다.


주명이 살짝 시선을 떨궈 호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왼쪽 눈은 하얀 안대로 막아져 있었으나 오른쪽 눈동자만큼은, 그 붉은 눈은 확실하게 호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 강렬함에 시선이 뺏긴다. 마음따윈 이미 넘어간 뒤야. 벌겋게 달아오른 호원의 얼굴은 상당히 못났다. 그가 보기 전에 고개를 돌려 호원은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러 제 마음을 삼켰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더 만져달라고 보챘을 지도 모른다. 그 손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고, 눈동자는 자신을 옥죄는 사슬과 흡사했다. 어서 빨리 네 마음을 토해내라며 자극하는 매개체는 호원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서투른 상상을 했다. 주명의 손바닥이 호원의 뺨을 쓰다듬는다.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오직 호원에게밖에 해주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주명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상의 두 소년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호원도 따라 손을 뻗는다. 그의 머리칼을 감싸 끌어안았다.


인정하자. 이 마음은 이미 우정을 넘어섰어.
세 번째 짝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