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하던 복수는 끝났다. 호원의 양 손은 날카로운 칼을 쥐고 숨을 죽였다. 하얗게만 질려가던 말끔한 손이 드디어 염원하던 원수의 피를 흠뻑 적셨다.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려던 남자를 반대로 자신이 벼랑으로 밀쳐 보낸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나라의 선망 받는 힘 있는 왕이 아니다. 온갖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던 신하들은 왕에게 고갤 돌렸다. 그를 모시는 충신은 없다. 호원은 단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을 그 틈을 파고들었다. 왕은 폭군이라며 자신이 아끼던 신하와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당신에게 있어 이건 완벽한 배드엔딩 아니겠어? 찌르고 돌려 잡은 내내 호원은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왕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핏덩이를 뱉어냈다. 네가, 감히... 분노에 가득 찬 붉은 눈동자가 호원에게 닿았다. 그래, 감히 내가 찔렀어요 폐하. 속으로 꾹꾹 숨겨져 있던 목소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그저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깊숙이 들어가는 칼날은 추락한 폭군의 배를 쑤셨다. 벌건 덩어리가 남자의 값비싼 천과 바닥을 가득 적셨다. 남자는 자신의 피가 더덕더덕 붙은 손으로 호원의 머리채를 쥐어 잡으며 입을 벌렸다. 네가, 이런다고, 모든 게 끝, 날 거라고 생각하나?
너도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이 몸을 해치는 것으로 네가 가볍게 넘어갈 줄 알아? 남자의 말이 맞다.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추락한 왕이라고 한들, 호원은 대역죄인의 입장으로 왕의 목숨을 직접 앗아갔다. 무엇보다 이 나라의 백성도 아닌 남자처럼 바닥 아래로 무너져 내린 패전국의 왕자. 모두가 아니꼽게 바라보던 저주 같은 존재인데, 그가 왕을 죽였다고 말한다면 다들 어떤 반응일까. 물론, 마음에 들지 않던 왕과 패전국의 귀속품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며 기뻐할 게 뻔하다. 나도 아마 죽겠지. 혼자 살아남은 죗값으로 지옥에 갈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내 사람들을 이리 만든 원수와는 함께 나락에 떨어지리라.
“그게 바로 제가 원하던 겁니다 폐하.” “....”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던 피에 적신 손은 힘없이 툭, 떨어졌다. 더 이상 서서 말할 힘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호원은 찔러 쥐고 있던 칼을 놓으면 남자의 몸은 가볍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움찔움찔 소동물처럼 움직이는 왕의 모습에 멀리서나마 엿보았던 강인함과 공포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는다. 나는,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야. 파르르 떨리는 손에는 남자의 피가 흥건하게 적셔 있었다. 더덕더덕 옷에 묻은 것도 남자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차림새였다. 하하- 호원은 실없이 힘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나는 살인마가 됐어.
하지만, 아직 전부 다 ‘벌’을 처리한 건 아냐. 마치 뻣뻣한 목각인형이 뻐걱대며 움직이듯 호원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쾅! 우르르르.. 마치 하늘께서 노하신 듯 창밖에 구름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명을 질렀다.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왕의 안식처가 담긴 방 안엔 싸늘하게 남은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폭군과, 죄를 지은 살인마와, 또 하나의 왕이 있었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 마냥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저 약간 찌푸린 미간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달려온 모양인지 작게 숨을 헐떡이기도 했다. 폭군을 쏙 닮은 밝은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호원이 눈에 담으며 픽 숨을 내쉬었다.
“바쁘신 차기 왕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무슨 일이야.” “....이곳이 누추한 곳은 아니지.”
폭군을 뒤로 이을 현명하고 강인한 또 하나의 왕자. 호원이 둘도 없을 전우이자 연을 느꼈던 남자. 모든 것을 뒤엎고 이 모든 걸 방관하고, 배신하고, 나를 동정하며, 죄악감을 가진 왕자님. 그는 폭군의 일을 마무리할 유일한 왕으로 채택됐다. 국가 백성들과 충신들의 모든 신뢰와 존경심을 안긴 그는 다음 세대를 잇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며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점으로선 나도 동감이야. 호원은 뺨에 묻은 피를 그나마 깨끗한 천으로 슥 눌러 닦으며 주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혈질이고 곧잘 화를 잘 내며 심술을 부리긴 해도 그는 백성들 앞에서 왕자의 위치에 서면 누구보다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알며 마음을 잘 다스리고, 어떤 것이 정치인지를 알며, 무엇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돌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충신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라면 좋은 왕이 될 것이다. 내 원수라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후- 그는 복잡한지 쓰러진 자신의 혈육과 호원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간이 없어. 그답지 않게 초조한듯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품속에 감추던 물건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깡! 소리를 내며 품에 감추었던 긴 장검이 호원과 주명의 사이로 떨어졌다. 주명은 문틈에 서있다 몇 걸음 다가와 호원의 앞에 섰다. 그는 결정했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며 호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뭘 망설여? 멀뚱히 칼만 내려다보는 호원을 향해 주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찔러. 줄곧 원해왔잖아.” “.....그렇게 되면 저하께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잖아?” “...내가 멍청이로 보여? 그 검, 어떤 검인지 너도 알고 있잖아.”
마지막 전장에서 네 혈육을 직접 찔러 두던, 마지막까지 백성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수백 명의 피를 묻혀온 검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왕가의 문양이 박혀 있는 손잡이만 봐도 이 검이 자신의 나라를 베어온 주범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바닥에 나뒹굴며 쓰러져 있는 폭군뿐만 아니라 그 또한 자신의 원수였다. 혈육을 잔인하게 눈앞에서 살해하고, 살려 달라 할 때 눈길조차 건네주지 않았으며, 죽여 달라 할 땐 살라며 벌을 내렸다. 너의 가증스러운 손을 혐오해. 피처럼 물든 눈동자가 무서워, 미워, 죽여 버리고 싶어. 인사처럼 건네며 말했던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말대로,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자신의 머리를 짓밟으며 아바마마의 목을 베고 소름끼치게 웃던 남자는 지금 바닥에 굴러 꺽꺽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피를 품은 채 나라의 원수인 나머지 혈육이자 이 나라를 잇을 왕인 호원의 원수는 눈앞에 버젓이 서서 죽이라며 말하고 있다. 주명은 마치 그게 순리인 양 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맨 처음 주명의 방 안에서 칼을 내밀며 심장에 겨누던 때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이다. ‘이걸로 만족하진 못하겠지만.’ 순순히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호원의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 가만히 마주하던 붉은 눈빛을 떠올렸다. 지금과 같다.
“난 이제 거절하지 않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칼을 쥐어들었다. 부드럽게 외이도로 감싸지는 손잡이를 쥔 채 주명을 향해 겨누었다.
“그래.” “이건 벌이야. 주명, 난 네 형을 칼로 찔렀다고.” “알아. 보고 있었어.” “네가 같은 왕가의 사람이라면 똑같이 벌을 받아.” “그래.”
“....죽어버려.” “...그래.”
수많은 피를 묻혔다. 형제는 용서받을 수 없다. 씻겨낼 수 없는 벌을 주기 위해 호원은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그들을 죽일 것이다. 죽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의 벌을 내리고, 호원도 함께 죽어 둘을 데리고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것이다.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호원이 어두운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한 발자국 걸어 다가오자 주명은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주명의 버릇이었다. 밉게만 보인다던 붉은 눈동자를 눈에 담기도 싫다며 말한 뒤로 주명은 호원이 가까이 다가올 때면 시선을 돌리거나, 호원의 눈을 막거나, 동시에 본인의 눈을 감곤 했다. 그 쓸데없는 배려심에 호원의 속은 늘 꿈틀꿈틀 구역질이 올라왔다. 눈물이 나왔다. 이런 배려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만큼은.
칼을 쥔 채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남자의 감겨 있는 눈을 향해 칼날을 세웠다. 꽉 다물어진 남자의 입술에 호원의 입술이 닿았다. 당황한 그가 뒷걸음질을 하는 사이 호원이 들고 있던 주명의 검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감겨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어느새 호원의 잠잠한 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잔뜩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호원은, 주명의 멱살을 콱 틀어잡으며 앞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가쁜 콧숨을 내쉬고 턱을 들어 올려 깊게 입술을 눌렀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을 수도, 꽉 몸을 밀어 붙일 수도 없었다.
겨우 몇 초, 짧은 입맞춤이 전부였다.
호원은 다시 콰르릉 울리는 하늘을 초첨으로 둔 채 붙여둔 입술을 떨어트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주명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야 겨우 나를 봤어.
“...명아, 죽음으로 빗는 벌보다 더 가혹한 벌이 뭔지 알아?” “....”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넌 죽음보다 더 잔혹하고, 잔인한 벌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거야. 동시에 멍하니 선 왕자의 몸을 밀치고 호원은 뒷걸음질을 쳤다. 준비는 이미 마친 뒤였다. 어두컴컴해진 창문을 벌컥 연 채 호원은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나무를 타고 내리지 않았다면 완벽한 자살행위였다. “-차호원!” 크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명을 뒤로 호원은 바닥에 착지할 때까지 몇 번이나 몸을 굴렀다. 그러곤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 *
하느님. 그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허억, 헉.... 아윽!”
얼마나 뛰었을까 호원은 호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싸움 이후 검술은 제대로 손을 대본 적도 없었으며 운동이라곤 공을 만지작거린 것이 전부다. 나라가 무너진 후 끌려왔을 땐 제대로 몸 한 번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런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겨우 목숨 한 번 부지해 보겠다고 뛰어대고 있었으니, 한계를 뛰어 넘었다며 말하는 게 당연했다.
주명의 의사는 아니었겠지만, 계산했던 것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호의병들이 호원을 쫓아왔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눈치 채자마자 공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의 심장을 겨냥하기 위한 화살이 속소포로 향해왔다. 다행인 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날도 어두워 제대로 겨냥하기 어려울뿐더러 화약에 적셔진 화승총은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그 점을 이용해 어두운 수풀들을 가로지며 호원은 달리고, 또 달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추격병들도 점차 발소리가 옅어졌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뺏길 위협은 사라졌지만 그와 반대로 자연에 의해 숨을 거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빗방울은 우수수 쏟아져 호원의 얇은 천자락을 흠뻑 적셨다. 흥건하게 젖었던 피가 그와 함께 씻겨 져 내려갔다. 숨은 점점 더 가빠졌고, 몸은 차게 식어버렸다. 중간중간마다 굴러 다친 상처들과 접지른 발목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다.
“아.. 왁, 으아아..!” 언덕 위를 올라가려다 실수로 다시 발을 헛디뎠다.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얕은 절벽에 몸이 데굴데굴 떨어져 굴러갔다. 아파...!! 쓰라린 몸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후두둑 쏟아졌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몸에서 욱신대는 고통이 호원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무거웠다. 구른 몸은 쉽사리 일으키기 버거웠다. 여기까지다.
‘여기, 여기까지라고...’
내 마지막. 더는 움직일 기력이 없다. 호원은 예감했다. 어느 정도 죽음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살아보겠다며 발버둥 치며 달리긴 했어도, 죽음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온 몸이 차가운 빗줄기로 적셔 흩어졌고, 쓰라린 몸뚱아리는 무겁고 아프다. 겨우 모아가던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벌을 받기 위한 단계일 것이다.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가야 하는 죄, 누군가의 목숨 값.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차호원은 죽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내려줄 벌에 모든 걸 맡겼다.
백화 왕은 제 스스로 나락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그는 단기간에 무력으로 국가를 진압하고 십여 명의 노예들만 겨우 남겨둔 채 대부분의 인명피해를 남겼다. 그의 신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 눈앞의 권력에만 눈이 멀어 멀리 큰 그림을 볼 줄도 모른 채 백성과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이내 자신의 충신을 본인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제 스스로 무너진 채 벌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의 몫은 호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죽인 대가로 호원 또한 쓴 벌을 지금부터 맞이하는 것이다.
‘손.. 깨끗해졌다....’ 남자의 피가 물들었던 손은 다시 말끔해졌다. 쏟아지는 빗방울 덕분이었다. 지금도 빗방울 세례 때문에 눈앞에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손이 다시 씻겨 져 내렸다고 한들 내면의 피는 여전했다. 호원은 천천히 손을 그러쥐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이 아팠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호원의 내면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살려줘. 구해줘. 라는 바람은 더 이상 하느님에게 빌지 않는다. 그는 구원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내려질 벌을 고르며 떨어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까지 빌 거야.
‘네가 벌을 받기를...’
너는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며 그 소중한 수많은 목숨에서 오직 나만을 구해냈다.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는 내 말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지키고 나만을 살렸다. 죽여 달라는 말에도 방관하며 듣지 않았다. 내 의사는 집어 던진 채, 남몰래 형에게 나를 살려달라며 빌었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까지 날 살리려고 했어. 그게 네 죄야. 사실은 전부 다 알고 있어도 난 너에게 절대 감사하다고 말하지도 살려달라고 하지도 않을 텐데.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기에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 ‘하느님, 벌을 내려주세요.’ 잠이 몰려왔다. 점점 더 내려 감기는 눈꺼풀에 간신히 힘을 준 채 호원은 끅끅 울음을 삼켰다. 가장 증오스러우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환상마냥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보이는 건 비겁하잖아. 또륵또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빗방울과 섞여졌다.
그에게, 벌이 내려지기를.
‘절대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리에 얽혀 맴돌기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홀로 남겨진 채 너는 왕위에 서게 될 거야.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현명하게 나라를 통치하며 평생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야 할 왕이 될 거야. 권력에 눈이 먼 그와는 다르게 올바른 것을 볼 줄 알고 걸음을 내딛을 줄 아는 현명한 왕이, 되며 넌 평생 벌을 받아낼 거야.
언젠간 자신과 걸 맞는 죄 많은 여인도 만나겠지. 그녀와 혼약을 맺고 결혼도 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가지겠지. 너처럼 시뻘건 눈동자를 가진 채 까만 흑발을 가진, 만져보고 싶은 반곱슬 머리카락 말야. 똑 닮은 아들이나 딸 하나씩 가진 채 평생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벌을 받을 거야. 넌 그렇게 평생 남을 위해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런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나 같은 존재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한 머리로 나라와 가족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몸이 되는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하느님, 부디 그 사람에게 그런 끔찍한 벌을 내려주세요.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을, 평화롭고 지루한 나날이 가득한 삶이 그에게 영원하기를. 그저 불운했던 나와의 존재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화목하게 그의 사람들과 함께할 그런 지루한 벌을 내려줬으면 좋겠어요.
호원은 눈을 감았다. 촉촉한 눈가가 눈시울을 가득 붉혔다. 잠이, 잠이 몰려왔다.
평생 그런 벌을 받고, 살아가고. 그런 식으로 끝나면 또 좋게? 아냐, 아냐 명아. 넌 죽고 난 다음 윤회를 거쳐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벌을 받게 될 거야. 차라리 지금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만한 네게 아주 끔찍한 벌.
하느님.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벌을 주명에게 내려주세요.
아주 먼 시간이 흐르고 흘러, 국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땅이 일궈지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고 나서. 네가 다시 태어났을 땐.
‘그 사람에게 나와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는 벌을 받게 해주세요.....’
지금처럼 전쟁이 발발한 삶이 아닌 평온하고 그저 깨끗한 시간만 이어지는 나날에서 네가 태어나 나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사는 거야. 불쌍한 주명, 불운하고 재수없는 나에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야. 넌 살고 죽고 태어난 그 순간까지도 나와 다시 붙게 될 거야.
그땐 이런 전쟁도 없을 거고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될 거고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될 거고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아도 될 거고
그렇게 함께하고
예전처럼 웃고 울고 화내고 떠들고를 반복하면서 살아갈 거야.
우린 예전처럼 같이 공부를 하며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돌아가고 나가는 길 전부 함께 걸어가게 될 것이다.
멀리서 편지를 보내며 서로 안부를 물어볼 필요는 없이, 애증에 찬 눈으로 폭언만 뱉어낼 필요도 없이
웃으면서, 만지면서, 입맞추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이가 될 거야.
그런 벌이, 네게 내려질 거야.
내려졌으면 좋겠어.
“....주, 명..........”
쩍쩍 말라붙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울분 가득한 소리를 눌러 삼킨 채 호원은 간신히, 동시에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 대신 빗줄기만 주룩주룩 쏟아졌다.
‘벌을 내려주세요.’
딱 한 번,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함께 할 기회를 주세요. “주명....” 무겁게 내려지던 눈꺼풀을 이내 내리감으며 호원이 작게 웅얼댔다. ‘허, 한 번만 불러라. 이름 다 닳겠다.’ 쯧 혀를 끌끌 차며 제 부름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앳된 주명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호원은 키득키득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색하지도 분에 차지도 않은 그저 기쁜 듯한 남자의 미소였다.
‘이렇게 불러야 네 눈이 나를 봐주잖아!’ 명아 눈, 볼 때마다 반짝거려서 정말정말 예쁘거든. 호원이 키득대며 웃었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더 말해주고 싶었어.
이 전에 더 쓰고싶은 내용은 많았지만....
주명이 이러이러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 라는 부분을 써보고 싶어져서 쓰게 됐다...
죽..은건 아니구요 저러다 성당 수녀님한테 거둬져서 성당 자체가 외딴 장소에도 있구.. (주명 나라의 아슬아슬하게 국경 외 근처에 있다.) 봉사 하면서 신부님 행세..? 신부님 일..? 배우면서 살ㄹ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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