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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7 끝
- 2017.04.27 아차차 또 하나의 별 러닝 로그
글
끝
2016.12.25
다리가 서서히 말을 듣지 않게 된 건 금방이었다. 18세 아시아 리그 2회전이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1 : 1을 달리는 시점 상대팀 파워 포워드를 밀어내려다 다리가 엇갈리고 그대로 엎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늘 그라운드와 골대만 바라보던 지후는 어느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종일 하늘 아래 그라운드를 달리는 주제에 위를 올려다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파랗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늘에게 시선을 뺏겨버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부상 탓에 움직이지 못했던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눈치챘던 건 응급요원들이 그를 싣고 가기 시작했을 때. 안지후의 공식전은 그렇게 인대 파열로 인해 끝나버렸다.
11살 때부터 정기 교육을 받아 시작한 축구는 7년을 채웠다. 세계 축구 선수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짧고, 턱없이 길지 못했던 축구 인생이다. 그에겐 얼마든지 억울하다 호소할 수 있는 목소리도, 분함에 내리칠 수 있는 주먹도, 서러움에 흘릴 눈물도 있었다. 단지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가 있을 뿐. 그 탓에 지후는 말하지도 때리지도 울지도 않았다. 무거워지는 다리를 느끼며 현실을 점차 받아들였다. 한계가 남들보다 빨랐다. 그저 조금 남들보다 빨랐을 뿐이다.
지후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그 뒤를 쭉 지켜보고 있던 부모님만이 어린 자식의 길을 놓지 못했을 뿐이다. 근처 병원에 호송된 후 결과를 받아들이고 난지 이틀 후, 한국에 있는 부모님으로부터 지후에게 연락이 닿았다.
[정말 이대로 네 축구를 그만둘 셈이냐?]
"..."
[지후야, 아깝지도 않아?]
"별 수 없죠."
다리가 안 된다니까요. 그의 부모는 자식이 눈물이라도 터트릴 줄 알았는지 덤덤한 반응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새삼스럽긴, 원래 이렇잖아요 저. 며칠 후 귀국 준비를 하겠다며 전한 후 그 뒤로 지후가 부모에게 연락을 넣는 일은 없었다. 그들 또한 연락은 없었다. 지후가 귀국 준비를 끝내고 나서려 할 때 쯤도 리그 3회전 패배로 자신이 이끌던 팀도 정리 준비를 끝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국하는 내내 지후는 온 스트레스가 쌓였다. 첫 번째로 그가 좋아하지 않은 요란스러움이 주변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내리고 한국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찰칵대는 셔터음 소리와 기자들의 고함 섞인 질문들 탓에 귀에 휴식을 주기가 힘들었다. 하도 인파가 몰려 밖에 발걸음 하나 내밀기조차 어려웠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지후에게 달려들다시피 하며 '부상은 어떤가요?!' '점차적인 부상 탓에 은퇴를 한다는 루머가 퍼졌는데 사실입니까 안지후 선수?!' '팀의 패배는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종류별대로 팩트 공격이 대단하다. 그쪽이 공격수 하셔도 되겠어. 쏟아지는 질문들을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하며 지후는 무시했다.
뭐, 이 기자들의 질문들이 대부분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지후의 공식 은퇴는 귀국한 후 바로 다음날로부터였다. 한국의 언론이나 축구협회에서도 막 뛸 수 있는 젊은 인재가 빨리 은퇴한다는데에 혼란을 가진 듯 보였다. 한동안 아시아 리그전과 안지후의 은퇴 이야기가 국내에 떠들썩했다. 언론이 들쑤시는 탓에 지후의 은퇴전도 이주 뒤쯤이 지나서야 진행할 수 있었다.
'...피곤하다...'
하루 열 몇시간 내내 축구를 하는 것보다도 겨우 몇 시간 언론에 휘둘리는 게 그에게 있어서 배로 더 고역인 일이었다. 겨우 기자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후의 몸은 축 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쩌렁쩌렁 울렸던 귓가가 드디어 잠잠해졌다. 짐을 정리하기 전에 안이 드러나지 않게끔 창이란 창의 커텐을 다 쳐 놓은 후 문단속을 꼼꼼히 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정적만 나도는 집 안을 훑어보던 지후는 털썩 소파 안에 몸을 기대 누웠다. 마주 편에 자리잡은 테이블 위에는 팬들이 보내준 선물들과 가져온 짐들이 한가득이다.
과자, 초콜릿, 좋아하는 책들과 축구공.. 가져온 옷들과 유니폼들 등등... 가만히 선물 꾸러미를 내려다보던 그는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들었다. 본인의 유니폼. 아시아 리그 전에 부상 직전 마지막으로 입었던 복장이다. 한 부분이라도 놓칠 세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입을 일도 없을 테니 자세히 들여다 보기라도 하자.
파란색. 하늘 위를 뛰어다니는 우리.
이제 그 위를 마주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 봐야겠지.
'...끝인가.'
끝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짧았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
오랜만에 지후가 생각나서 써보았다!
얘 축구 그만둔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잘 울지는 않는 녀석이니 그저 끝까지 울진 않았겠지만
착잡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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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차 또 하나의 별 러닝 로그
1. 하이로그 (2015.02.02)
「대회는 벌써 코앞이고 드래곤윙즈와의 시합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한 거에요.」
「역시 생각이 깊으신 주장님이네요! 아, 벌써 끝낼 시간인가요? 그럼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각오 한 번만!!」
「말이라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열심히, 분발해서, 강한 팀으로 성장해 잘근잘근 천-천히 밟아드리겠습니다!」
이, 이거 위험한 발언 아닌가요―?!
하하,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
.
.
.
"진짜 악마야 우리 주장은"
"시끄러워."
어떻게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뱉어낼 수 있을까. 그녀로선 아직까지도 적응되지 않는 주장의 모습이었다. TV 속에서 상쾌한 웃음을 흘리는 안지후 군. 그리고 부실 안에서 잔뜩 얼굴을 굳힌 채로 오늘 한 연습 훈련 일지를 쓰고 있는 안지후 군.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이거. 오랜만에 외부에서 온 인터뷰가 하나 들어왔다고 해서 설마설마 했는데 저렇게 대답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그녀 산수유 뿐만이 아니라 이글타이푼즈 전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주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작 장본인은 뭐, 왜, 뭔데.
"너무 다르니까 그렇죠."
"그렇게 달랐어?"
응, 엄청. 엄청 달랐어. 본인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능하다면 지금 얼굴을 찍어서 인터뷰 영상이랑 비교해주고 싶다. TV속에서 나오는 살랑살랑한 웃음, 젠틀한 이미지, 생각이 깊은 멋진 주우우우자아앙? 자, 그럼 지금을 비교해보자. 시끄러우니까 제 옆으로 다가오지 말라며 저 멀리 혼자 앉아있는 생각없는 주장, 젠틀함은 무슨 싸가지가 없어서 파고 또 파고 판 이미지, 매번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얼굴. 이것만으로도 비교하면 됐지. 그래서 저기 TV에 나오는 사람은 이 안지후가 아니라 다른 안지후라고? 도플갱어야?
그만 좀 해라. 별의 별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가운데 실컷 제 이야기를 가지고 떠들어대는 이글타이푼즈 동료들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주 내 얘기 가지고 놀림거리로 삼고 있네 그냥. 이미지가 좀 다르면 뭐 어때서? 원래 연예인도 본인 모습을 숨기고 TV에 나오는 거야. TV는 그러라고 태어났어. 참으려고 하니까 자꾸 정도를 넘으려고 한다니까.
"그래도 너무 심했다. 저건… 인격 자체가 다르다고. 이중인격이야?"
"연기를 잘하는 거야."
"웃긴다."
부탁이니까 나한텐 그렇게 소름돋게 웃지 좀 마. 따끔한 그녀의 한 마디에 지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상관 없어.
"지금 쯤 인터뷰를 보고 꽤나 약이 오르고 있겠지."
"뭐?"
"약 좀 오르라고 말한 거야."
몰랐어? 오히려 그가 아이들을 향해 정색하며 잔뜩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 나름 인사한 거야. 굳이 작년 우승팀 말고도, 다른 팀에게도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한 거라고. 각오 한 번만 말해달라고 했으니 친절하게 인사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지후의 말에 이글타이푼즈 전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벙찐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저게 인사면 인사만해도 전세계 사람들이 싸움만 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주장 좀 이상해. 좀이 아니라 많이지 많이. 수근수근 다시 주변에 제 이야기로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TV속의 제 인터뷰를 지켜보던 지후는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래, 잘근잘근. 천천히 밟아준다며 선전포고를 했으니 아무렴. 성격 급한 녀석들이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인터뷰를 저렇게 한 것에 대해서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뭐, 작년엔 졌다. 인정한다. 본인이 약했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후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번엔 더더욱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한 번 우릴 꺾고 우승 좀 했다고 기고만장하지 말아주시지. 패배를 겪은 후엔 그 다음 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게 될지 뼈저리게 알게 해줄게.
이건 아직 시작일 뿐이잖아. 무서워하지 말고.
그럼 잘 부탁해. 이글타이푼즈 주장, 안지후야. 몇 팀을 제외하고 절대 붙어볼 수 없는 팀의 주장이니 기억해두는 걸로도 충분하겠지 아마.
"1차전이 드래곤윙즈였으면 좋겠는데. 한 번에 이…"
"아, 주장 제발 좀!"
2. with 비단 (2015.02.03)
아니, 우리 첫만남이 왜이래? ( 안 지 후 & 비 단 ) 비단 선수 그거 알아요? 아스타컵 근처에 생긴 생과일 주스가게. 엄청 맛있다던데! 정말? 그런 곳이 생겼어? 먹고 싶다! 나중에 한 번 마셔보세요! 거기에 '딸기 쉐이크'가 가장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딸기는 또 엄청 좋아하지!" 뭐처럼 날씨도 좋고, 훈련도 없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종일 집 침대에 뒹굴며 오늘 첫 시작을 무엇으로 보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중, 저번 주에 수줍게 윤아가 말을 건넸던 생과일 주스가게가 떠올랐다. 비단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생과일! 딸기 쉐이크! 그래, 오늘 하루의 첫 시작은 그거다! 싶어 자리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옷부터 갈아입기 시작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의자에 놓여있던 유니폼 쪽으로 손을 뻗을 뻔 했지만― ...훈련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유니폼을 입을 필요는 없겠지? 자동적인 몸 반사가 우스워 낄낄 웃음을 터트리던 비단은 그 옆에 놓여있던 검은색 코트와 나머지 옷들을 집어 후다닥 입었다. "좋아!" 옷도 잘 차려 입었고, 가자! 처음엔 다른 팀 애들과 갈까 싶었지만 그는 오프에 잔뜩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집에 가서 잔뜩 경기 영상을 볼 거야!" 아직도 눈에 불을 키고 신나게 말하던 이연 감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기들끼리 분명 잘 놀고 있을텐데 만나자고 하면 실례겠지..? 아쉽지만 결국 혼자 발을 옮기기로 결정. 아스타컵 대회장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여유롭게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 없이 걸어가는 건 조금 쓸쓸하지만, 가끔 가을 탄 남자처럼 멋지게 혼자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흥겨움에 휘파람을 불며 현관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비단이 대회장에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앗, 도착이다 도착!" 사실 아스타컵 대회장 주변에는 많은 음식점들과 구경할 것이 잔뜩 있다. 가장 화려한 장소엔 화려한 것들이 많이 놓여있어야 하는 법. 아무래도 여러 홍보용으로 오시는 것 같지만. 매번 대회 출전 때마다 먹거리가 가득한 주변을 해치고 대회장 안을 들어가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눈물을 삼키고 팀원들과 안을 들어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오늘은 아니지롱! 당당히 지갑을 들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기 위해 왔단 말이지! 굳이 윤아가 추천한 음료수가 아니더라도 다른 음식들을 여러 먹고 타이거킹즈 아이들에게 사다 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참 많네. 평소 대회장 아니면 시선을 잘 두지 않았던 탓일까. 한 눈에 들어오는 많은 인파에 비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 한 번 놀러오면 물건이나 사람이 잃어버리기는 쉽상이겠다. 비단은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 제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소중한 듯 꼬옥 품에 안고 조심스레 걸음을 앞섰다. 소중한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다시 대회장 근처로 걸음을 옮기다보면 윤아가 설명해준 생과일 주스가게 대문이 크게 달려있는 작은 가게가 눈앞에 보였다. 아, 저런 작은 곳에 있었구나!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쪽으로 달려들었다. 카운터 쪽에 계신 아주머니는 비단의 빠른 행동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렴 뭐 어떤가! 일단 딸기 쉐이크부터! 아주머니! "여기 딸기쉐이크 하나 주세요!" "딸기쉐이크 두개요." . . . "어?" "어라?" 비단이 카운터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한 사람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동시에 말을 꺼낸 건 처음이라 신나는 마음에 "찌찌뽕!" 이라고 외칠 뻔 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그건 실례려나.. 하고 비단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같은 말을 꺼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참이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비단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동시에 눈이 마주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잠깐만, 그것보다 우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 상대가 흔하게 생기진 않은 것 같은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상대방도 당황한 듯 흑안의 눈동자를 굴려 비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별 한 점 없는 밤하늘 마냥 쌔까만 흑발과 흑안.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말이지... 제 기억력을 더듬어가며 비단이 끙끙거렸다. 그는 천천히 그의 옷 매무새를 흝어 보았다. 검은색 파카에 흰색 니트, 머리색과 닮은 검은색 바지도... 흐음, 뭐지 진짜. 익숙하게 본 이미지는 아니다. 이야기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어디서 본 것 같은.. "타이거킹즈..." "어라?" "비단..." 놀랍게도 저보다 먼저 입을 열어 제 이름을 부른 건 상대방 쪽이었다. 상대방은 비단 그를 알아보았는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이름을 아네? 그럼 나도 이 사람을 알고있는 건가? 것보다 축구팀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축구와 관련된 사람이 맞을 터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다시 굴려가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흑발, 흑안, 검은색 안경..... 어? "와아아! 이글타이푼즈 주장 안경남이네!" "아이고, 미안해요~ 딸기가 딱 떨어지는 참에... 한 개밖에 못 만들겠네." 그리고 동시에 또 한 번.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딱딱하게 웬 존댓말?" 같은 주장이고 하니 편하게 불러! 아니, 별로 편하게 부르고 싶은 생각 없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타이거킹즈 주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지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로선 답답한 일이었다. 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날에 관련이 없는 사람이랑 만나게 되는가. 그것도 뭔가 가장 귀찮을 것 같은 사람이랑. 뭐처럼의 오프에 편히 집에서 쉬고 있어야 했던 것이 정답이었다. 그놈의 딸기 쉐이크에 발을 옮긴 것이 바보지, 바보야. 주장, 대회장 근처에 있는 생과일 주스가게. 딸기 쉐이크가 맛있다던데. 그래서? 하나 사와! 싫어 쪼잔하게.. 시루 거랑 두개 사와! 싫어 사오라니까! 싫어 사와!!!! 그리고 본인이 먹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지 않냐고, 한 번 좀 사와달라며 징징거리던 수유의 말에 결국 이기지 못해 사려던 참이었다. 그녀 또한 귀찮아서 저한테 부탁한 것임이 틀림이 없는데도. 저런 설탕 덩어리가 뭐가 그리 맛있단 말인가. 지후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것 투성이였지만. 결국 시루까지 합세해서 부탁을 받았으니 사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돌아가는 길에 사자, 사고 얼른 던져주고 집에 가서 쉬자. 라는 마음에 아스타컵까지 걸음을 옮긴 거였는데. 이런 변수가 일어날 줄은 생각 못했지. 설마 타이거킹즈 주장과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만나게 될 줄이야. 주장인 그와는 직접 경기를 한 적은 없지만 경기 내에서 얼굴을 몇 번 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말을 나누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보고 싶지 않은 팀중 하나였으니 별 수 없나. 그래도 주장과 주장과의 예의 정도는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까딱 고개를 위아래로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지후의 인사를 받은 비단은 싱글벙글 웃으며 양 손을 흔들어주는 걸로 답했지만. "딸기 쉐이크를 사온 걸 보면 좋아하는 것 같네?" "좋아하는 건 아니고, 부탁으로." "어, 그래? 난 이거 맛있다고 해서 먹으려고 왔지!" 아, 네. 그러세요. 그거 안 물어봤는데요. 지후의 단답에도 불과하고 비단은 혼자 신이난 듯 말을 줄줄 늘여놓기 시작했다. 이 가게를 추천해 준 것이 본인의 팀 선수라는 것을, 돈을 모아서 맛있는 걸 사먹으려고 바로 뛰어왔다는 것을, 그 와중에 이글타이푼즈의 주장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내용 등등. 지후에게 쏟아부었다. 정작 듣고있는 장본인은 대충 단답형으로 내용을 흘려듣고 있었지만. 저기... 지후와 비단 둘 사이에서 곤혹스런 얼굴을 하던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야기를 하던 비단도, 이야기를 듣던 지후도 동시에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어떡하지? 한 잔밖에 없는데 누구한테 줘야 하나..." "그야 당연히 제가 제일 먼저 왔..." 그래서 먼저 온 사람한테 염치없이 달라고 하는 거야 지금?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안 맞는 사람이었다. 아니, 난 야보해줄 생각 없어. 그러지 말고-! 나 진짜 먹고 싶어서 혼자 여기까지 달려왔단 말이야! 나도 혼자 걸어온 건 마찬가지야! 투닥투닥. 한 쪽은 웃는 얼굴로, 한 쪽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싸우는 가운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는 혼자 곰곰히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둘이 아는 사이인 거 같은데 그냥 반반씩 나누어주면 안 되나? 특별히 값도 더 싸게 해줄게!" "아는 사람 아니에요!" "싸게요? 좋아요!" "누구 마음대로!"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면 되잖아~!"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아주머니! 지후의 의견도 없이 재빨리 돈을 내는 비단의 행동을 보고 지후는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결국 정말로 정확히 반절을 나누어 받게 됐다... 이거 반절 마신 거 아니냐고 화내면 어쩌지. 벌써부터 들려올 수유의 잔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겨진 적은 양의 딸기 쉐이크의 모습이 지후의 눈에는 못마땅했다. 원래는 두 잔을 샀어야 했는데. 이 시간에 딸기가 떨어지다니 참 대책성이 없는 가게다. 다신 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야겠다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이 나이에 한숨만 쉬면 주름만 깊어진다? 그런 지후의 모습을 본 비단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아직도 안 간 거야? 지후는 그런 비단을 질린 듯한 얼굴로 응시했다. 좀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울 줄 모르는 비단의 손에는 지후와 같은 플라스틱 컵이, 안에는 딸기 쉐이크가 담겨 있었다. 지후보다 양이 더 적은 것을 보아하니 나오면서 조금씩 먹은 모양이다. "이거 맛있네! 마음에 들어. 나중에 또 사먹어야겠다!" 사실 다른 것도 먹고는 싶었는데 더 돈 쓰기는 아깝더라고~ 시원털털한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비단은 어느새 빈 딸기 쉐이크를 흔들어보았다. 역시 반절 정도 딱 나누니까 배에 차는 느낌은 없구나! 혼자서 멋대로 떠들고 멋대로 하라지. 그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종일 피곤했는데, 갑작스런 타이거킹즈 첫만남에 더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아파오는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지후가 자리에서 서둘러 떠나려던 찰나, 비단이 그를 불러세웠다. 안경남! ...안경남 아니라니까. "그럼 여기에서 만나서 즐거웠어! 잠깐이지만" "난 안 즐거웠어." "진짜 까칠하구만~ 부드럽게 대하자고, 나중에 경기에서도 만날 텐데." "만난다고?" 당당히 말하는 비단의 발언에 지후는 괜한 헛웃음이 났다. 누구랑? 그쪽네 팀이랑 경기에서 만난다고? 바랄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작년도 2강에 오르던 팀과, 그 축에도 못 끼던 날개가 꺾인 팀이 과연 우리랑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아쉽지만 이번 아스타컵 경기에서 볼 일은 없을 거야." 약자가 강자와 붙게 되는 확률은 별로 없잖아. 아주 운이 좋으면 초반에 팀대 팀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초반에 만나지 않고 토너먼트를 올라와야 대전할 수 있는 상대라면 솔직히 그의 팀과 저의 이글타이푼즈가 만나게 될 확률은 없었다. 바닥을 기어다니고도 땅을 파야하는 확률. 퍽 비아냥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지후를 멍하니 응시하던 비단은 그를 따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히 기분 나쁘게 들릴 만했을 터인데,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한참동안 큭큭거리며 웃던 비단은 조심스레 다시 고개를 들어 지후와 눈을 마주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그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지. 반대로 이글타이푼즈가 타이거킹즈를 못 만날 수도 있다고?" 어느쪽이던 확률은 반반이지만, 난 그 운에 모든 걸 걸어보려고 해. 어떻게 해야 50% 확률로 작년도 2강 팀을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하하, 농담이야 농담!" 작년 결승전까지 올라온 강팀이니 떨어질 일은 웬만큼 없겠지! 워워, 화내지 마! 너 진짜 무섭다! 낄낄거리며 양 손을 흔드는 비단의 모습은 천연덕스럽다. 하지만 과연 농담으로 말한 것일까. 웃음 속에 숨겨있는 가면이 더 무섭다던데.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다. 어쩌면 지후 본인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대와 만나게 되는 건 여러모로 귀찮다. 말을 더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결국 마지못해 지후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거는 신경전이지만, 말을 끝내고 나면 본인이 피곤해진다.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그는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라, 가려고? "그럼 나중에 보자 안경남!" 결국 아무리 말해도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뭐야, 이상한 팀에 이상한 주장이라 이건가? '다신 안 엮였으면 좋겠어.' 정말로 엮이지 않게 될지는 지후 본인도 알 수 없는 앞날이겠지만. 3. 스토리 1 (2015.02.06)
"누가 안경남이야?!"
"네?" "하나요?" 이건 말도 안 돼.
"여기서 이글타이푼즈 주장이랑 만날 줄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지후 선수, 안 먹는다며? 먼저 먹고 싶은 사람한테 양보해주면 안 돼?"
"마음대로 하세요."
"뭐라고.."
"안경남이라고 부르지 마!"
단지 승리를, 승리를 위한.
"이번엔 아쉽게도 시합에서 졌더구나."
"보셨었나요?'
그럼, 네가 나오는 결승전 시합인데 안 볼 수가 있었겠니. 텔레비전으로 죽 보고 있었단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보이는 한 여인은 여유로운 웃음을 흘기며 지후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지후는 따라 멋쩍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진 경기를 눈앞에 보여드리게 되다니 부끄럽네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좀처럼 제 경기를 볼 수 없는 분이었다. 일에 종일 치이고 다니시니 아쉬워도 별 수 없었지만. 하지만 결국 뭐처럼 본 경기를 망치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 이글타이푼즈는 졌다. 승리는 드래곤윙즈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이랑도 같이 보고 싶었는데 바쁘다고 하더구나. 나 참…"
"바쁘시잖아요. 그리고 진 경기를, 부끄럽게 보여드릴 수는 없어요."
"맞지, 그럼."
네가 하는 말이 다 맞아. 여인은 손에 쥐고있던 서류들을 정리하곤 책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계속 서류에게 향했던 눈은 어느새 지후를 향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 같은 미세한 시선은 지후를 언제나 잔뜩 날이 서도록 만들었다. 그래, 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의 눈이었다. 여인은 슬그머니 의자에 앉던 몸을 일으켜 지후에게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지후는 제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곧바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아깝게 져버렸지만, 내년이 있잖니. 반드시 이기렴"
"..네."
"믿고 있단다."
우리 지후.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내가 믿고 있어. 내가 보고있는 거야. 지후의 양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두 손은 창백한 피부색이 돋보일 정도로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여인은 끝까지 지후를 놓지 않은 채로 얼굴을 가까이 마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드럽게 곡선이 휘어진 상냥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눈. 저 눈만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직선, 정면을 향하는 저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이, 차가운 눈동자가. 지후는 그런 그녀를 이런 상황으로까지 자신이 몰아붙인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합쳐져 제 뺨이 다 화끈거려졌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내년에 더 열심히. 쉽게 열리지 않는 말을 열심히 오물거리며 그녀에게 제 의사표시를 전했다. 반드시 이겨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이것이 현재의 지후가 여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말 한마디었다. 다행히 그런 지후의 올곧은 말이 본인으로선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목각인형 마냥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눈이 전보다 한껏 여유로움을 가진 채 풀어졌다. 어쩜, 장하기도 하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손에 닿는 곳까지 도와줄게."
"응, 고마워요."
"너는 변함없이 공차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어면 돼."
그럼 알아서 모든 것들이 딱딱 제자리를 갖추어지게 될 거야. 모든 건 네 그저 네 물건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그 분들도 그러기를 바라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저절로 복이 굴러들어올거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굴러들어온 복들을 줍기 위해선 지후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어림잡아 상황들을 곱씹어 이해해가던 지후는 고개를 올려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사그라진 얼굴 속에는 이젠 다정함이 묻어있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순수한 본인의 미소, 지후는 그런 여인의 모습이 가장 좋았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면 본인도 따라 웃음이 났다.
"내년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 드릴게요.
엄마.
이기는, 이겨야만 하는
단지 승리를 원하는 승리를 위한
그런 축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주장, 오늘 훈련 너무 고된 거 아냐?"
"감독님의 새로운 스타일에 맞추려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어?"
하하, 정말? 내가 보기엔 이 정도가 열사병 수준인데. 종일 험악하기 짝이 없는 고된 훈련에 상연은 눈물까지 다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훈련시간에는 이리도 엄한 건지. 땡땡이나 딴짓을 좀 피워보려고 해도 저를 변함없이 지켜보는 (아니, 이건 감시하다가 더 옳은 표현이 아닐까.) 주장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아니, 정말! 우리! 이렇게까지! 훈련을! 해야 해?! 라고 울분을 토해내면 우리들의 위대하신 주장님께서는 너무나도 당당한 얼굴로 뻔한 대답을 가져왔다. 항상 단답형. 당연하지.
"대회가 코앞이야 선배.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선수생활 못 해."
"주장은 너무 딱딱해… 후, 이런 날씨엔 데이트가 최적인데 말이야."
기왕이면 예쁜 주장이 열심히 훈련하라고 응원해줬으면 ("예쁜 주장이 아니라서 미안하다 그래."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할 맛이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예쁜 감독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 들어오는 감독님마다 다 남자더라. 옆동네 감독님은 여자라면서? 왜 우린 여자가 아니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대답이 또…) 이건 불공평한 일이라고. 고된 훈련에 온 몸이 땀범벅으로 된 상연이 제 옷을 펄럭여가며 씩씩거렸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응?
상연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던 지후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더니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 감독이라던가 그런게 없어서 이쪽도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이쪽 훈련이 상대팀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잖아.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후에게 되물었다.
"좀 더 세심하게 기회를 쓰기 위해선, 숙련도와 그만큼의 실력이 필요해."
그러니까, 훈련을 해야한다는 거지. 다른 팀보다 더.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기술들을. 무작정 임무를 다하는 행동을 해도 그게 티가 나는 행동이라면, 팀원들 발목을 잡는 것 외에 뭘 더 하겠어?
좀 더 개가 되기 위해선 개처럼 달리는 것이 좋아. 우리 팀 발목을 물지 말고, 다른 팀의 발목을 물어. 잽싸게 물어서 뜯어버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우와, 주장 진짜 악마 같아."
뭐, 그 방법이 딱히 싫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고지식한 면 속에서는 숨겨져있는 지후의 본색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상연 본인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들었지 덜하지는 않지.
네네, 주장 말에는 더 이상 반박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양 손을 번쩍 든 상연이 실실 웃음을 흘기며 제 주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 훈련을 더 하러 가면 된다는 거지? 힘들고, 귀찮기는 하겠지만 주장님이 하라고 하는데 별 수 있나. 잘하면 잽싸게 도망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운 마음과 함께 지후가 말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상연이었다.
"오늘은 6시까지만 해."
"알았어, 알았어~"
나 6시 종 땡 치면 바로 갈 거니까 말이야! 어영부영 대답하며 다시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가는 상연을 바라보던 지후는 슬쩍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못말리는 사람이다.
"… … … … 개라… … "
본인이 먼저 상연에게 이야기 꺼냈지만, 역시 개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개라, 개로 표현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려나. 아니면 그보다도 더 추한 존재로 말해져야 하는 걸까? 결국 어느쪽이든 우리 이글타이푼즈가 비참해지는 것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지후는 그라운드 위에 서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많은 이들이 이글타이푼즈에 들어오고, 많은 이들이 나와 그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긴다는 타이틀만 가질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뭐든지 했다.
왜?
이겨야만 하니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각자들의 사정이 있었다. 그건 서로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꼭꼭 숨겨야 하는 자신들의 과거가 벗겨지지 않도록 발버둥쳐야 했으며, 숨을 쉬어 살아가기 위해 뛰어가야만 했다. 쉬지 않고 계속 달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계획대로만 잘 진행해주세요. >
이긴다.
이겨야만 한다.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승리 이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잖아."
시키는 대로 다 해줄게.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승리를 줘.
자, 어서 굶주린 개들에게 확실한 희망을 안겨줘.
4. 벌칙 (2015.02.09)
지후는 어색하게 제 머리를 매만졌다. 만지면 만질수록 한 곳에서 걸리는 빨간색 고무줄 끈이 유난히 신경쓰였지만. 그는 괜히 콧등을 쓸거나 안경을 치켜올리기도 했다. 안경도 곧 벗어야 하는데. 끙,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후는 어떻게 해서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쓰고 싶어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손이 아래로 내려가단 검게 주름잡힌 치마 질감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아무리 다른 곳으로 돌려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제 모습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짧은 상의는 손을 조금만 올려도 올라 붙는 탓에 결국 애꿎은 스카프만 만지작 거렸다.
지후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지후는 본인의 눈을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릎 위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새까만 주름잡힌 차마나, 따라 색을 물들인 것 마냥 하얀 스카프에 까만 상의 하며. 치마를 따라 무릎까지 달라붙는 검은색 스타킹까지. 그야말로 복장은 천상 여고생의 옷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입은 장본인이 남자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 . . . . . . . "
말문이 다 막혀 헛웃음만 나온다. 지후는 다시 전신거울에게로 다가가 제 하얀 스카프를 매만지며 짧은 주름치마를 잡아내렸다. 이건 또 뭔데 이렇게 짧은 거야. 정말 여성들이 이런 옷을 자주 입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주름치마는 바람만 불어도 치마는 춤을 추며 올라가기 일쑤였다. 그저 몸을 숙이거나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얇은 천이 살결에 닿아 들썩거리는 통에 온 몸의 신경은 그쪽으로 쏠렸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제 모습. 아아, 좀 제발! 거울을 통해 보이는 지후의 얼굴은 잔뜩 인상이 찌푸려진 채였다.
아니, 게임이 도대체 뭐길래? 이게 다 벌칙으로 걸린 탓이었다. 그것도 두명에게 동시에 지적을 당해서. 지후는 사회자를 한 죄밖에는 없었다. 본인들끼리 즐겁게 게임을 한 주제에 왜 게임을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몰아붙이는 건가. 두통이 올라와 지후는 제 이마를 연신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손목까지 덮는 옷 소매가 살짝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하니 또 한숨이 나왔다.
이 상태로도 충분히 심각한 것이 분명할 터인데, 더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추가 벌칙이었다. 지후는 슬쩍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고양이 머리띠와 하이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말로 미쳤다. 미쳤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게 벌칙을 시킨 건지. 세라복은 이미 입어서 그렇다 쳐도 저 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조심스레 빨간색 하이힐을 집어들었다. 세상에 이게 굽이 왜이렇게 심해? 직접 신고 서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 거릴 것만 같았다. 그 전에 이걸 신고 걸어다닐 수 있는 건가? 한참동안 하이힐을 노려보던 지후는 결국 제자리에 하이힐을 돌려 놓았다. 하이힐은 빼자, 이걸 신다가 넘어져서 다리라도 다치면 큰일이다.
그럼 다음은 고양이 머리띠인데. 어디서 구해온 건지 검은색 고양이 머리띠는 하이힐을 따라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본인을 괴롭힐 거라면 교복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까지 하지 않는다면 분명 얄미운 녀석들이 하이힐까지 동시에 하게 만들 것이다. 머리띠를 집어들어 한참동안 고민하는 듯 하던 지후는 결국 머리띠를 제 머리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귀에 꽂으려던 찰나,
쾅!
" 주장 ! ! ! ! 옷 만들어오냐 ! ! ! "
" "
" "
그리고 잠시 정적.
" 푸, 푸하하하하! 우리 주장 생판 여자 다 됐네!!! "
" 입 안 다물어? "
" 악, 주장! 내 눈이 너무 아프잖아! "
" 그럼 입히지를 말던가! "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들어오는 거야? 몸에 반응기라도 달았나 제대로 된 타이밍이였다. 재수없게도 딱 머리띠를 쓴 순간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이글타이푼즈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지후의 우스운 꼴을 보며 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몇몇은 눈을 가리며 제 눈이 아프다고 시늉했다. 그러면, 입히지를, 말던가.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동시에 올라오며 지후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남자애들은 저마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시선을 어디에 떨구어야 할지 안절부절하는 것과는 반대로 여자애들은 신이 난 듯 지후에게로 달려들었다. 주장! 아까 제가 묶어드린 머리 안 푸셨네요? 옷을 입으러 들어가기 전 빨간색 고무줄로 직접 지후에게 머리를 묶어준 장본인은 다름아닌 시루였다. 아, 그래. 네가 이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진들을 다 유포해버린다는 협박 때문에 안 뺐지.
" 주장 팬티도 여자 거 입은 거야? "
" 산수유 너 그거 성희롱이야. "
그녀는 신기한지 지후의 치마를 붙잡고는 올렸다 내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너 그거 그만 해라. 그녀의 행동에 질색한 지후가 수유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을 쳤다. 어 주장 부끄러워 한다. 뒤로 주춤거리는 지후를 향해 순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꺄르르거렸다. 누가 부끄러워 한다고?
" 이야 주장 이대로 나가도 여자로 보겠다. "
" 난 진짜 여자가 이렇게 입어주면 좋겠는데…… "
" 선배가 입고 싶어? "
" 어휴 왜 하필 남자가… "
" 불만이면 선배가 입어 "
난 이런 하늘하늘한 아가씨 옷보다는 멋진 정장같은 옷이 더 어울리거든!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는 지후의 시선에 시원스런 미소를 날리던 상연은 슬금슬금 걸음을 뒤로 옮기더니 영수의 뒤로 숨었다. 아니, 선배. 그렇게 해봤자 너 다 보이거든.
상연과 지후를 사이에 둔 솔레이가 둘을 번갈아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장, 그래서 상의탈의는 언제 할 건데? 항상 필요한 건 제치고 쓸데없는 것만 다 기억하더라. 상연에게 시선을 두었던 지후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솔레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그거 꼭 해야해? "
" 일단은 벌칙이잖아. "
" 여자애들 앞에서 벗으라고? "
" 이글타이푼즈 앞에서. "
" 아니, 그 전에 안경부터 벗어야지 주장! "
혼자 게임기를 만지며 열중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쪽에 신경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재빠르게 말하는 솜씨가 윙어 다웠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지후는 질색한 얼굴로 주현을 노려보았고, 그는 실실 웃다 살기어린 주장의 시선에 힐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맞아! 안경도 벗고 상탈도 해줘야지! 이들 사이에서 가장 신이 난 듯 수유가 방방거리며 말을 이었다.
" 안경이라면 제가 빼드릴게요! "
" 잠깐… 야! "
본인의 동의도 상관없이 멋대로 시루가 그의 안경을 채간 덕분에 지후는 곧바로 안경을 뺏겨 시야를 잃어버려야만 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지후는 눈이 매우 나빴다. 안경이나 렌즈가 없으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벌써부터 뿌옇게 어린 주변의 시야에 지후는 제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럼 오히려 더 좋지 않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벗으면 차라리 창피함도 덜할 거 아냐. 어느쪽에서 들려오는 건진 몰라도 영수의 말이 이어졌다. 결국 그래서 벗어야 한단 말이잖아. 지후의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글타이푼즈였다. 그 전에 나 진짜 주장 맞아?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 벌칙이니까. 자 주장 얼른 벗어! "
" 벗 어 라 ! 벗 어 라 ! "
" 전 안 벗는 것도 좋은데요~! "
" 으악, 내눈! 눈이 너무 아파! 나 그냥 나가면 안돼? "
목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가운데, 지후는 모든 애들을 잡아 얼굴이라도 한 대씩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이젠 박수소리까지 들렸다. 가지가지 한다 정말.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며 지후는 제 스카프를 내려다보았다. 하얀색만 흐리게 보이는 스카프도 어서 저를 빨리 해방시켜 달라며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나도 벗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말이지.
정말 골 때리는 놈들. 다시는 사회자를 하지도, 게임을 하지도 않을 테다.
결심이라도 한 듯 지후의 눈이 비장해졌다. 그는 곧바로 하얀 스카프를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지후의 손에 따라 제 위치에 묶여있던 스카프가 아래쪽으로 미끌어지더니 그가 손을 놓자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후는 거침없이 다음으로 행동을 옮겼다. 검은 세라복 상의를 올리더니 허리춤에 있는 지퍼를 잡아 올렸다. 지이익, 지퍼를 따라 올라가는 손틈 사이엔 그의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오오! 이글타이푼즈 선수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후, 심호흡이라도 한 것 마냥 깊게 숨을 들이쉬던 지후는 세라복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곧바로 머리 위로 올렸다. 의외로 큰 사이즈였던 세라복은 손쉽게 지후의 머리까지 올라가 그 위롤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벗은 세라복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지르며 상의를 이글타이푼즈 쪽으로 집어 던졌다. 지후의 드러난 상체가 유난히 창백해보였다. 본인의 얼굴이 다 죽어갈 정도로 창백했기 때문이려나.
" ………됐지? "
끝났으니까 이제 다들 좀 꺼져.
.
" 아 주장 얼굴 빨개졌다. "
" 닥쳐 "
" 아 주장 삐졌다. "
" 닥치라니까! "
5. with 무주 (2015.02.10)
쾅!
크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주 편에 앉아있던 이글타이푼즈 지후 선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파 죽겠네. 바닥에 있는 힘껏 머리와 부딪혔던지라 뒤통수가 욱신욱신 거렸다. 지후는 제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저를 밀어 넘어뜨린 장본인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삼켰다.
“주먹질 하자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싸움엔 영 재주가 없는데.”
“장난 아니야 나.”
“나도 장난 아니야.”
나랑 싸워서 선수에서 박탈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야? 네가 없어진다면 나야 뭐 반가운 일중에 하나겠지만. 한껏 빈정거림이 섞인 지후의 말에 무주는 살벌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저 도마뱀 새끼는 뭐가 불만인 거야. 경기가 끝난 후 잔뜩 얄밉게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얄밉고 짜증나게. 막 경기가 끝난 참이었다. 드래곤윙즈와 이글타이푼즈의 결승전 우승팀을 가리는 마지막 경기가. 그 경기에서 애석하게도 이글타이푼즈는 드래곤윙즈에게 우승컵을 빼앗겨 버렸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쉽게. 인정하기 싫은 상황이었음에도 본인 팀의 진영 골대 안에는 이미 상대편의 스트라이커가 넣은 공이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울리는 도마뱀들의 환호성이란.
정말, 짜증나기 짝이 없어서.
뭐, 불평불만을 줄줄이 내놓는다 하더란 들 경기가 변하겠는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지후는 제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끝냈다. 졌다는 이유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주변은 이글타이푼즈의 훌쩍거림이 가득했지만. 운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남들 앞에서 꺼이꺼이 우는 것이 더 치욕스럽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다고 옛날부터 생각해온 지후였다. 그래서 그는 울지 않았다. 이대로 끝아 아니고, 진 것도 아니기에 멈춰버린 제 감정을 차갑게 식히고 본인의 팀 대기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적당히 열만 식히고 다시 대기실로 들어가자. 그런 차원에서 자판기에 음료수도 하나 뽑고 느긋하게 제 일을 마치려던 중이였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이 와중에 너와 마주치게 된 건 얼마나 큰 불행인가. 너도 저와 같이 열을 식히기 위해 나왔던 참이었는지 떡하니 만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경기 끝나고 막 30분도 안됐을 때에. 타이밍이 안 좋네, 무시하고 지나가자 라는 생각에 지후는 자리를 일으키려 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 잔뜩 화난 듯한 얼굴을 한 그, 무주가 지후에게로 다가와 그를 밀쳐버린 것이다. 결국 그대로 엎어져 바닥으로 데굴데굴. 화가 나는 것보다도 어이가 없었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밀치는데.”
“넌 밀쳐도 된 사람이니까 밀친 거야.”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다쳐? 다쳐어?”
씩씩거리며 화를 내던 무주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든지 제 입술을 마냥 잘근거렸다. 넌 지금 너 자신밖에 눈이 안 보이지? 의미모를 말을 뱉어내는 그의 모습에 지후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알아듣게 설명 좀 해. 멋대로 밀친 주제에.
뻔뻔스럽게 말하는 지후에 답답한 건 무주 본인이었다. 결국 망설이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이미 너 때문에 다친 사람이 있는데, 넌 네 몸밖에 신경 안 써?”
“무슨 소리야?”
“네가 오늘 넘어뜨린 그 선수.”
발이 엄청 꺾였어. 금이 갔단 말이야.
발에 금? 내가 넘어뜨린? 갑작스레 줄줄이 말을 뱉어내는 통에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오늘 경기를 말하는 건가. 생각하기도 싫은 경기였지만 상대방이 저리 씩씩대는 와중이고, 아예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지후는 오늘 경기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떠올리는 단 한 명의 선수.
아
오늘 집중적으로 마크를 하라고 지시를 받았던 드래곤윙즈 선수들 중 한명이었다. 윙어 플레이를 하던 선수. 유난이 빠르게 그라운드를 치고 올라가 꽤나 애를 먹었던 놈이었다. 달리는 속도가 윙어에 비하면 한참 느린 지후에게는 불만족스런 상대. 하지만 지시를 받았으니 어쩌겠는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플레이를 위해 조금 방법을 쓴 것뿐이었다. 물론 평소 때보다 더 많이 발을 걸고 늘어뜨리기는 했으나. 그래서 그가 제 플레이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는 말인가?
“더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넌 어쨌을 거야.”
아아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었네. 그는 유난히 본인의 팀을 우선시하는 선수였다. 그것 때문에 제 발목을 잡는다 하더란 들 본인의 팀을 내버리지 않는 이상한 선수. 자기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본인 팀원에 대한 일이 생기면 발벗고 나서는 타입이었다. 그게 정말로
‘귀찮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겨우 다리 하나 금간 거 가지고 엄청 말 많네.”
“뭐? 넌 선수로서 자각이 없어?
“걔가 내 길을 방해한 게 잘못이지. 그러니까 축구도 못하는 게 그라운드 위에서 설치고 다니랬나.”
“너 진짜…”
그럼 왜, 내가 그깟 발목 상처 입힌 거 가지고 무릎을 꿇고 사과라도 하실 줄 알았나. 무주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경기를 뛰면서 상처 입힌 사람은 많고, 그에 대한 보상을 안겨준 사람들 또한 많았다. 이번에도 그러면 되는 거야. 다치면 돈을 주고 치료받으라고 하면 돼. 선수로 못 뛸 정도도 아니면서 뭘 그래?
돈만 쥐어주면 좋다고 받을 사람들이면서. 아주 작은 부분부터 큰 곳까지 비뚤어진 지후의 생각은 속이 너무나도 시꺼멓다. 긴 흑백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물감은 더 이상 밝게 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거야. 그걸 그 누구도 아닌 네가 간섭 할 이유는 없다는 거지. 그 어떤 자들이 저에게 손가락질 한다고 해도 변함없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
무주는 그런 지후를 내려다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 앞에서 직접 듣게 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야, 안지후 너.
“그딴 축구가 진짜 축구라고 생각해?”
“적어도 난 하나의 전술이라고는 생각해.”
“미친 새끼.”
“너도 만만치 않아.”
이런 식으로 되갚아주는 걸 보면 우리 팀원들 중 제일 띨띨한 놈보다 더 멍청한 것 같아. 지후는 남은 말을 쏘아붙이며 그를 마지막까지 놀려댔다. 그 후에 보일 반응은 안봐도 뻔하지. 또다시 주먹을 날리고, 아니면 내게 욕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가운데 지후는 동시에 무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단호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올곧은 시선. 그 눈동자가 그라운드 위에 있을 때에는 안지후라고 해도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네 눈이 정말로 싫더라. 지후는 제 찡그린 인상을 펼 수가 없었다. 그를 보면 항상 그랬다. 화가 난 건지, 화가 풀린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던 무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같은 놈들은”
“……”
“올해도, 내년에도, 내내년에도, 매년”
우리 드래곤윙즈에게 지게 될 거야.
어디까지나 매년 전해지는 선전포고. 언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내 귀에 직접 듣자니 역겨워서 죽을 것 같다.
“……후…”
그거
“참 기대되네.”
어디한번 해봐. 난 너희가 부서질 날을 고대하고 있을게. 무주의 선전포고에 지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만약, 그 변하지 않는 지겨운 구식축구로 내년에도 우릴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흰 이미 우리에게 미리 진 것을 예고한 것과 다름이 없어.
6. 혼자 (2015.02.11)
그가 아이들 곁에 잠깐 사라졌을 때
그 공백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건 오직 그만이 알고있는 작은 비밀과 같았다.
“이글타이푼즈 이 쓰레기 새끼.”
네가 그러고도 축구선수야? 아니, 넌 그냥 돈에 미친 광대지, 광대. 아이들을 낄낄거리며 벽에 몰아붙인 한 남자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아이들 사이에 낀 남자는 묵묵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드러나는 싸늘한 얼굴의 남자, 아니 남자 아이. 지후였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솔직히 본인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인은 감독님이 맡긴 일 때문에 훈련 시간을 비우고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일을 끝마치고 난 후 바로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 옮길 참이었는데. 그랬는데. 가던 도중 정체모를 또래 아이들에게 붙잡혀 끌려와버렸던 것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즈음엔 인적이 드문 곳에 아이들이 모여 지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타이푼즈- 쓰레기라니. 갑자기 끌고 온 주제에 내뱉은 말이 참 앙증맞기도 했다. 지후는 그들 쪽으로 눈을 흘기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훑어보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낯설지 않은 분위기의 아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키가 멀대 같이 큰 한 남자아이를 보면 문득 머릿속에 스친 한 축구팀이 떠올랐다.
‘아아, 1회전 때의.’
1회전 경기 때 붙었던 상대 팀이었다. 무명 팀. 듣도 보도 못한 무명 중의 무명, 기억 할 필요도 없는 팀을 왜 기억 한 건지. ‘피그말리온’ 별 특이한 이름도 다 들어보겠다며 지후는 허한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 모습을 피그말리온 선수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웃어? 너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이 새끼, 진짜 뻔뻔한 놈이네.”
“용건이 뭔데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용건? 용건이라고 물었냐?”
용건이라면 아-주 많지 많아! 피그말리온이라는 팀을 떠올리게 해 주었던 키가 멀대 같이 큰 선수가 씩씩거리며 지후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예전 시합 도중에서 지후가 직접 발을 걸어 시합에 방해를 준 민진 선수였다. 이런 아이들 꼭 있지, 꼭 있어. 지후에게 귀찮은 일상과 다름이 없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는 다시 민진에게 되물었다. 그래, 용건. 용건이 뭔데. 이런 상황에서도 뻔뻔스럽게 당당한 지후의 행동에 피그말리온 선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제 눈들을 굴렸다.
“너 생각을 달고는 사냐?”
“적어도 너보단 달고 사는 것 같은데.”
“뭐라고? 이게!”
민진이 지후 그를 밀치며 다시 벽으로 몰아붙였다. 콘크리트 벽을 부딪치는 것은 생각보다 아프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지후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폭력을 행하다니, 너희 팀의 선이 딱 보인다 보여. 그 와중에도 빈정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지후였기에 직접 그를 밀친 민진도, 피그말리온 선수들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답답해서 죽어갈 지경인 피그말리온과는 반대로 지후는 여유로움이 가득 있었다. 이런 식으로 경기 후에 이글타이푼즈에게 보복하려고 오는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 이 외에도 여럿 팀들이 지후에게 찾아온 전적이 많았다. 다른 선수들 생각하면 너희는 그냥 지나가는 쓰레기 정도지. 이제껏 많은 선수들과 팀들을 회유해 온 지후에게 있어선 하품이 나올 일이었다.
날 여기까지 끌고 와서 뭘 하려고? 너희가 화가 다 풀릴 때까지 때리려고? 때릴 수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선수가 다른 팀 선수와의 폭력 내력이 있을 경우, 사건적 유의 인물로 간주해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된다고.”
“읏… 그래서 뭐! 우린 이미 졌는데!”
“내년에도 안 나오려고?”
한 번 선수에게 폭력행위를 하면 뒤에 영원히 쫓아올 텐데. 이렇게 보복하려고 온 것 도차도 범죄에 해당한다는 거 모르나. 협박 말이야 협박. 익숙하게 제 말들을 뱉어내는 지후에 피그말리온 선수들은 얼이 빠진 채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 사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민진이 지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너 자꾸 말 돌릴래?!
“너 때문에 모든 걸 다 망쳤어! 너랑 그 노랑머리 놈 때문에 우리 팀은 졌다고!”
“우리 때문에 진 게 아니라 너희가 그냥 못해서 진 거겠지.”
“반칙으로 이긴 주제에 말이 많아?!”
“반칙은 재미용으로 삼아 가지고 논 건데, 우리 팀은 본 실력을 보이지도 않았다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시합에서 전혀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쉬다시피 경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직접 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뛰었던 피그말리온 선수들이 가장 잘 알 터였다. 굳이 반칙을 쓴 이유는, 가벼운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 평소 실력을 비교한다면 너희는 우리 발끝에도 못 미치지. 어디서 감히 반칙 때문에 졌다고, 우리를 비하하는 거야? 그건 내가 얍삽한 수법을 써서가 아닌, 너희의 실력이 바닥을 기어서의 이유가 더 큰 거겠지.
그래서 너희는, 우리 이글타이푼즈를 업신여겨야 할 정도로 낮은 위치에 있다 이거야. 왕좌들에게 거리낌 없이 발을 내밀다니 그건 사형감이지.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 이유는 많아. 더 이야기 해줘?”
“안지후 너……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치졸하고 더러운 놈이구나.”
“그걸 이제 알았나. 나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성격 나빠.”
그리고 더 똑똑하고 영리해. 너희들이 끙끙거리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나는 더 높은 곳에 위치해서 너희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야. 이글타이푼즈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그럴 만한 능력이 돼. 그러지 않으면 안 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할 말들 없으면 꺼져.”
내가 좀 바쁘거든.
**
“주장! 이제야 왔어?!”
“응.”
“오늘 일이 좀 있어서 훈련에 참가 못했는데, 다들 부지런히 했지?”
설마 나 없다고 훈련 안 한 건 아니고? 제 말에 뻘뻘 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팀원들을 보자 하니 웃음이 날 뻔한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누가 쓰레기라고?
쓰레기는 너희야.
우리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반드시 위쪽으로 전진할 거니까. 잠시 숨죽여 물에 잠겨있었을 뿐이지.
너희들은 절대 하지 못하는 것.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간섭들 하지 마.
7. 혼자2 (2015.02.16)
✿ ✿ ✿
붉게 달아오른 왼뺨은 아직까지 통증으로 욱신거렸다.
지후는 일이 끝난 직후 화장실로 뛰어들다시피 들어왔다. 얼굴을 살펴보기에는 주변에 거울이 없었던 탓.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년은 잽싸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손잡이에 잠금장치를 걸었다. 경기장 화장실 안에는 운 좋게도 지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안도의 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세면대의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연하게 붉어진 제 뺨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아, 결국 일을 벌였구나. 지후는 자신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 때렸다.
새빨개진 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내일쯤 지나면 분명 진한 푸른 멍이 생길 것이라. 제 얼굴을 걱정해야하는 판에 지후는 어쩐지 자신의 상황에 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경기는 결국 그분들이 생각하시는 대로 진행시키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이글타이푼즈의 잘못이 아닌, 주장인 본인의 잘못이었다. 지시는 감독에게 내려왔고, 주장에게로 전해졌다. 마지막에는 타이푼즈 전원이 알아야 할 전달사항이었다. 하지만 주장은, 안지후는 전해져야 할 사항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본인의 생각으로.그렇다면 소년은
도대체, 왜? 어째서?
‘쭉 이겨왔던 우리들이 진다라.’ 지금까지 이글타이푼즈에서 오랫동안 축구를 해온 지후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명령을 받아냈다. 올해는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대회에서 내려와라. 그것이 너희가 해야 할 이번 마지막 경기일 것이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년에도 충분히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다줄 것이고,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중에만 계획을 바꾼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내년에도 얼마든지 축구를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어.
하지만, 그 짧은 선택의 시간동안 소년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올해, 올해는 놓칠 수 없는 소년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년도는 어떻게든, 모두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하지만 소년이 제 의견을 말하려 입을 열기를 시도하면 이미 어른들의 매서운 눈빛들이 아이를 덮친 후였다.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주장 너를 비롯해 팀원들 모두를‘
“아 따가...”
입가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때린 상대방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만들어버렸을까. 얼굴 뿐만이 아닌 억지로 붙잡힌 제 옷매무새도 잔뜩 구겨져 있었고 얻어맞은 복부는 토기가 올라올 정도였다. 벌써부터 희게 변한 뺨이 짙은 멍으로 물들어져갔다.
설마 질 생각이었어? 이번 경기에서?
난 앞으로 네 지시 따위 듣지 않을 거야.
진심이야? 왜 우리가 져야하는데?
나도 모르겠어.
뿌연 거울을 통해 비추어진 제 모습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안지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제 팀원들의 목소리가 지후의 귓가를 파고들어 찢는다. 결국 참지 못해 본인의 귀를 틀어막고 나서야 울리는 불신의 목소리들은 차츰 사라졌다. 지후야. 내가 걸어간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 난 틀리지 않은 선택을 한 걸까?
묽게 달아오른 소년의 눈가는 유난히 눈물로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제발, 누가 나를.
8. with 상연 (2015.02.16)
✿ ✿ ✿
반대로, 반대로
“상연 선배!!!!”
“아, 깜짝이야!”
남이 집중하고 있으면 뒤에서 소리 좀 지르지 말란 말이야! 앵앵거리는 소리에 상연은 질겁하며 제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반면에 소리를 내지른 장본인인 지후는 눈에 불을 키고 곧바로 달려들 태세였다. 우리 주장은 뭐가 또 불만인데? 분명 저보다 한 살은 어린 연하일 텐데, 주장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은 또 엄청나서.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상연은 뒤로 주춤거리며 지후와의 거리를 떨어트렸다.
“또? 뭐가 또 불만이냐고?”
또, 또 자기 잘못은 모르지. 품에 잔뜩 훈련일지를 껴안고 있던 지후가 몽땅 상연에게로 내던지다시피 하며 비명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어제 왜 할당량 다 안 채우고 갔어!”
“아, 그거 들켰... 악!”
“바보 여자킬러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악, 아파!”
우당탕탕. 이글타이푼즈에 또 큰 소리가 울렸다. 질겁하는 상연의 얼굴과 잔뜩 화가 난 지후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솔레이와 수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어제 주장 없을 때 몰래 딴 짓 피우지를 말지. 제가 일을 저지른 만큼의 벌을 받는 것이라며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왜 나만 벌을 받... 주현이도 어제 게으름 피웠어.”
“지금 저쪽에서 벌받고 있어.”
“....”
윙어라서 이럴 때만 얍삽하게 빠른 거야? 상연, 그는 잔뜩 불만인 얼굴로 주장이 주는 벌을 몽땅 받고 있었다. 그래봤자 반성문 한 장과 운동장 몇 바퀴이긴 하지만. 문제는 어린 놈의 따가운 시선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이다. 흰 백지에 끄적끄적 낙서를 하고 있으면 매서운 눈초리가 유난히 신경이 쓰인다. 제대로, 제대로 하고 있다니까. 겨우 ‘잘못 했습니다’라고 적힌 글자가 두어 개 박힌 종이를 지후 눈앞에 흔들어주며 상연이 힘겹게 말했다.
“제대로 쓰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나름 열심히 쓰고 있어! 휴..”
“그러니까 훈련 좀 열심히 하지. 왜 또 멋대로 게으름을 피운 거야?”
‘가끔씩은 좀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아.’ 야, 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거든? 훈련이 너-무 많아서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뿐이야! 매년 바뀌는 감독만큼 전술과 훈련의 특성도 달라진다. 한창 대회시즌 때문에 달리고 있는 와중 훈련은 플러스, 플러스, 그 플러스의 배가 된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고. 그런데 그걸 다 따라가고 있는 너도 신기하고, 꼬박꼬박 그 훈련을 몽땅 하고 있는 나도 신기하다 야. 매일매일 폭풍처럼 쏟아지는 훈련의 양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다 난다. 상연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연필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나마 내가 수비수라서 다행이지... 솔레이처럼 스트라이커나 수유처럼 골키퍼라면.... 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걔넨 더 붙지 않아?”
“팀원마다 주어지는 특성이 각각 다르니까, 훈련도 다르지.”
“내 말이! 그것까지 하면 진짜 죽어버릴지도 몰라.”
우리 가녀린 수유는 어떻게 그 힘든 일을 다 하고 있는 걸까? 솔레이의 무지막지한 공을 받는게 얼마나 안쓰러워 보이던지.. (그렇다면 선배가 수유 대신 공을 받아주던가. 지후는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지 않고 씩씩하게 웃으면서 공을 받는 게 예쁘다고... 아! 쓰러질 땐 내가 받아줘야지! (그전에 선배가 쓰러질걸. 잽싸게 받아치며 지후가 모진 말을 뱉어냈다.) 선배 말에 토 좀 그만 달지? 어느새 연필을 내려놓은 상태인 상연이 지후를 노려보았다. 저 태도를 보아하면 오늘 내에 반성문을 쓰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지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포지션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거네?”
“응? 뭐, 그렇지. 가장 편한 걸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겠어?”
“선배가 원한다면 바꿔줄 수 있는데. 원래 축구를 하면서 다양한 위치에 서봐야 축구를 좀 더 잘 아는 거랬어.”
나도 그걸 위해서 중앙미드필더를 선택했으니까. 수비 진영과 공격 진영을 좀 더 빠르게 눈안에 익히고 승리를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이 포지션을 선택한 후 단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은 없다. 물론 수비와 공격 양쪽 다 잘 해야 하는 상황에 사령관 위치까지 맡으니, 버겁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재미있다고? 난 숨 막힐 것 같은데. 생각하기도 싫다 야. 중앙미드필더인 만큼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매일 공을 이끌어 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럴 바엔 수비수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는 게 낫지.
수비수도 나름 해야 할 건 많다고. 선배도 그렇잖아. 벽에 기대 그를 지켜보던 지후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연 선배는 수비수 말고도 제대로 할 수 있는 포지션이 많아. 대충 지켜봐도 알 수 있으니까. 지후가 훈련일지를 대충 훑어가며 상연의 훈련 성과를 쭉 읽어 내렸다.
“상연선배는 나름 근력, 지구력, 기력도 충분히 몸에 배어있는 편이고. 공을 다루는 센스랑 빠르기도.. 현이 만큼은 못해도 빠르잖아. 충분히 공격 측에 있어도 나쁘지 않은 편이거든. 물론 수비도 좋지만.”
“너 지금 나 훈련하라고 입에 초콜릿 쥐어주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다른 포지션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 훈련에 대해 불평도 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라는 뜻이야. 이길 거면 더 멋지게 이기는 것이 좋잖아. 안 그래? 지후의 말에 상연은 저도 모르게 골을 넣었던 솔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멋있긴 멋있었지만.
그렇지?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지후에 상연은 저도 모르게 아차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야!
“물론 공을 뻥뻥 넣는 것도 엄청 멋있겠지만! (나니까!) 훈련 힘들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수비수로도 충분하다고...”
“그래...”
그래도 나중에 한번 공 넣는 연습, 조금이라도 더 해봐. 훈련 목록에 추가해둘게. ....야! 안지후! 너 그게 목적이었지?! 쾅! 책상을 주먹으로 쿵쿵 치는 상연의 얼굴은 억울하다는 제 의사를 확연하게 알리고 있었다. 이 악마! 괴물! 훈련 괴물아! 저리 가 훠이훠이! 그게 지후에게는 통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의 옆에서 끄적끄적 훈련일지를 적어 내려가던 지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
“잘 해봐. 선배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주장 너를 위해서라도 절대 안찰 테니 걱정 마!”
✿
“내 전술 없이 이길 수 있을까가 의문이지만.”
라고 말한 후에는, 아주 멋진 걸 보여줬었지. 아니라고, 하지 못할 거라고 순간에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 이를 악물고 골대를 향해 거부감 없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새로운 스트라이커가 탄생했구나. 라고
【 상연 선수, 힘차게 공을 왼쪽 편으로 차올리고....!!! 공은 골키퍼의 손끝으로 지나... 】
거봐 선배.
【 골대 안으로!!!! 후반전으로 첫 이글타이푼즈의 득점골입니다!!! 】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응,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다 있더라.”
말했잖아.
왜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말하지 못하는 걸까 선배. 이건 본인이 솔직하지 못한 탓. 오로지 내 잘못이기에 이번에도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건지 이제는 떠올릴 수도차 없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어차피 알게 될 이야기일 텐데 참 웃긴 일이야. 원망스러워하는 눈을 보고 싶어서 이런 걸까? 내가 무슨 마조도 아니고. 그런데 가끔 생각해. 정말 그 미워하는 시선을 받으려고, 내가, 경기에서 그런 선택을. 이제는 작게 남은 멍을 매만지던 지후가 슬쩍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대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 화가 나고, 왜 기쁜 건지.
선배는 잘했어 그게 맞는 거야. 말하고 싶은 뜻은 전하지 못하고 또 반대로, 다시 반대로 반대로 돌리고 또 돌려.
“사과 안 해도 돼. 연습이나 늦지 마.” 전하지 못한 뜻은 결국엔 다시 마음 안 쪽으로. 마주친 회색 눈을 보면 또 제가 잘못 말하게 되었구나 싶었다. 자, 이번에도 멍청하게 또. 반대로, 반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아, 사실 이것도 거짓말이었는데. 때린 건 좀 아프더라.
8. 산수유 관록 (2015.02.16)
비가 내리는 날엔 반사적으로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한다.
2년이나 흐른 일이었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아직 그 때의 시간에 멈춰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창밖을 내려다보면 비가 쉴 틈 없이 뱉어내듯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밖에서 할 수 있는 훈련들은 글렀구나. 뭐처럼 짜온 일지들이 무의미가 되어버렸다. 소년은 눅눅한 비 냄새를 맡아가며 자동으로 제 발목을 쓸어냈다.
우르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소년은 2년 전의 상처투성이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비, 끈적거리던 훈련 직후, 유난히 흐렸던 시야.
조각조각 찢어져버린 제 기억들.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 오늘과 같은 날씨였다. 소년은 막 중학교로 올라와 조금 더 색다른 축구와 대회를 나가고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한껏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조심성 없이 하루를 보낸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제 기분과는 다르게 창밖은 어두컴컴한 비와 바람으로 가득했다. 종일 내릴 생각이구나. 훈련이 끝나고도 비는 멈추지 않고 주룩주룩 내렸다. 혼자 집에 갈 생각을 하니 근심스러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어린 소년은 쏟아지는 비를 가벼이 생각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가벼이 여겼던 어린 소년의 생각은
현재 소년의 평생 후회와 상처로 남겨졌다.
**
어린 소년은 매일 눈물을 그치지 않고 흘려댔다. 마침내 마음속에 있던 수도꼭지가 고장이 나 폭발한 셈이다. 꾸역꾸역 막아가던 것이 쥐어 터지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멈추지 않고 새어나오는 물들은 짜디짠 눈물로 변해갔다. 아이가 꿈꾸던 것들은 조각조각으로 흩어지고, 마침내 재만 남게 되어버렸다. 찰나의 실수로, 찰나의 사고로, 찰나의 생각으로. 매일 욱신거리는 제 다리를 응시하며 어린 소년의 마음은 또다시 찢어지고, 또 찢어졌다.‘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왜 하필 나야? 하루하루 다음날만 기다리던 자신에게 왜 그 흔한 기회들이라는 건 오지 않는 건가.
아, 결국 내 손으로 기회를 내버린 건가.
오랜 생각 끝에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부턴 우는 것을 멈췄다. 소년의 부모님은 아이가 안정된 거라며 안심했다. 하지만 안정된 것은커녕 어린 소년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다들 나이와는 다르게 어른스럽다며 소년을 칭찬했지만, 소년은 아직 어른스러운 척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에 불과했다.
첫 시련이란 가혹한 법. 충고 하나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아이에겐 그 시련을 견딜 수 있을만한 면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만일 직접 발을 내딛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치닫는 폭풍에 이겨내지 못하고 바스스 부수어진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최악 중의 최악으로 몰아가고,
이겨낼 수 없음에 제가 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 안지후 병실 맞나요~? 와우, 엄청 크네! 너희집 부자야?’
네가 찾아오기 시작한 후부터는.
‘감독님이 너 병문안 오래!’
벼랑 끝에 머물던 소년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
“왜 넌 오자마자 베개를 던지는 거야?!”
“그럼 넌 왜 매일 오는 건데!”
처음 만난 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소녀는 지겹게도 소년의 병실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년의 의사가 아닌 오직 소녀의 의사로서 결정되는 일. 찾아오지 말라며 빽빽거려봤자 통하는 건 없었다. 내가 오겠다는데 넌 뭔 상관이야?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소녀가 얍삽해 며칠이 지난 후 병실을 들어오는 소녀를 향해 소년은 베개를 던지기 시작했다. 베개는 항상 얼굴에 정통. 맞으면 소년은 킥킥거리며 소녀를 놀리기 일쑤였다.
아오썅, 내가 다음엔 꼭 막는다! 비웃는 소년을 향해 소녀는 씩씩거리며 그에게 소리쳤다. 골키퍼라면서 어떻게 환자가 던진 공하나 못 막냐? 그리고 내일은 오지 마! 이런 말만 수백 번 반복하고 또 반복. 결국 오늘도 또 똑같이 흘러가겠구나 싶어 소년은 소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무시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게 또 사람 말을 쥐뿔도 안 듣네! 항상 쌀쌀맞게 행동하는 꼴이 소녀는 얄미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감독님이 부탁하시니까 오는 거라니까!”
“한 번이지, 매일일 리가 없잖아.”
문안으로 한 번 정도 찾아오는 걸 매일 가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셨을 리가 없지. 그 정도로 나랑 친분이 있는 분도 아니었고. 내 말이 틀려? 소년의 말에 정곡이었는지 소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멀뚱멀뚱 소년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소년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새끼... 진짜 쪼잔하게... 아 알았어! 소녀가 발을 통,통 내뻗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면 문안 온 이유를 만들면 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소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박수를 쳤다. 그래!
“나 이제부터 주전으로 골키퍼에 서게 됐다고, 전하러 왔어!”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 자식 너 엄청 까칠하네? 빨리 나으라고! 넌 바로 주전이라면서!”
감독님한테 말 다 들었어! 소녀에게 있어서 소년의 이름은 흔하디 흔한 것 중 하나였다. 매일 귀에서부터 들어온 이야기들 중 하나이기 때문. 센스가 남달리 독특하고 유별나며 엄청난 노력파. 내일 훈련을 거르지 않는다는 노력 쟁이. 엄청난 모범생이구만! 매일 공을 받는 연습을 하며 들었던 이름에 소녀는 얼마나 잘난 놈인지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뭐, 이런 땅꼬맹일 줄은 몰랐지만. 키득거리는 소녀를 소년이 한참동안 노려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이야기를 했다고? 했단 말이지....
그래봤자 뭘 하겠어, 내가. 우울해진 마음에 고개를 숙인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축구 안 할 거야.”
“뭐?! 미쳤냐?! 왜!”
“악, 아파아파! 아프다고 으악!”
물론 그 작은 중얼거림을 가까이에 있던 소녀가 놓칠 리가 없었다. 너 삐졌냐?! 안 삐졌어! 그것보다 이것 좀 놔라! 양 뺨을 잡아당기며 고함을 지르는 소녀에 소년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뭔 여자애가 이렇게 드센 건데! 너, 다시 말 안 해?! 소년의 뺨을 강하게 꼬집던 소녀가 되물었다.
“다리 다 나으면 축구 할 거라면서!”
“난 말도 안 꺼냈어! 그쪽들이 멋대로 생각하는 거뿐이야!”
“나으면 바로 축구할 수 있다며! 왜 그러는데!”
“안 나아! 못 나아! .....한 번 다치면 계속 다친단 말이야!”
분명 가도 계속 할 수 없을 거야....!
어느새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를 스쳤다. 소년의 양 뺨을 붙잡은 손이 촉촉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또 뭐야. 너 울어? 남자가 왜 울어! 아이의 눈가에는 눈물로 펑펑 젖어 들어가고 있었고, 눈물은 소녀의 손을 빠르게 적셔갔다. 소녀는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런 소녀의 얼굴이, 소년은 너무나도 미웠다. 그녀가 미웠다.
넌 매일 축구를 하고 돌아오지만, 난 매일 병실에 틀어박혀있기만 하잖아. 매번 문안을 하러 오면서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찌나 얄밉고, 또 어찌나 슬프던지. 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은 마음속 깊이 상처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 마음을 소녀가 알 턱이 없었기에, 주룩주룩 멈출 줄 모르는 눈물범벅인 소년을 보고 잔뜩 당황했지만.
왜, 왜, 왜 우는 거야..... 뭐가 그리 서러운지 꺼이꺼이 우는 소년을 보자하니 소녀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오, 좀! 찌질하게 울지 마!!! 그녀가 다음 행동을 옮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난 산수유야!”
“컥!”
“골키퍼고!”
“숨막, 숨막ㅎ 컥!”
어깨, 어깨! 목을 잡지 말고 어깨를 잡아 이 골빈 똥개야! 어깨, 어깨! 목을 잡지 말고 어깨를 잡아 이 골빈 똥개야! 꽉 목을 붙잡은 소녀, 아니 수유는 놓을 줄을 모른 채 그대로 소년, 아니 지후를 흔들어댔다. 네가 산수유인 걸 누가 모른대?! 몇 번이나 이야기 한 걸 내가 까먹을 바보로 알고 있나! 제발 놔달라는 식으로 지후의 팔이 버겁게 휘적거렸다. 그러든 말든 수유는 묵묵히 지후의 목을 붙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글타이푼즈를 공격하는 공을 막을 거야!”
“그게 나랑 뭔...”
“하지만 혼자론 못 막아! 그러니까 네가 막아!”
“뭐?!”
내가 공을 잘 막는 짱짱 센 골키퍼이긴 하지만! (너 엄청 당당하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까! 죽 글러브만 손에 잡고 상대방의 얼굴을 때리던 나에게, 이제 사람이 아닌 살아있지 않은 공을 빠르게 잡으라니. 어려운 일이었다. 빠른 주먹은 피하면 그만이지만, 빠른 공은 피하기는커녕 맞아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내가 감을 잘 익힐 때까지 네가 도와줘야 해! 맞을 듯 하면서도 묘한 수유의 의견에 지후는 얼이 빠진 듯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 선수라며. 뛰어난 미드필더라고 들었어!”
“아...”
“나보다 더 선배인 만큼, 너는 나를 위해 그라운드를 뛰어야 할 의무가 있다!”
“뭐야 그게!”
“나를 위해 이겨! 이기게 만들어!”
넘치는 승리의 기쁨을 알게 해줘. 네가! 더도 말고 안지후 네가! 너밖에 못하잖아! 너 축구 잘한다니까 이기게 해줘야지 멍청아!!
이기게 한다. 나를 포함해서 너까지. 나와 너를 합하면 우리. 수유의 말에 멍하니 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지후가 조심스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맑은 연붉은 색 눈동자와 마주한다. 그 눈에는 거짓된 그릇이란 없다. 내가 너의 승리를 위해 달린다고? 되물으면 수유 그녀가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왜, 불만이야?
아니, 불만이 아니라. 달싹 제 마른 입술을 오믈거리던 지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좀 신기해서.
왠지 쭉 불안해왔던 것이 없어진 기분이야. 이기는 이유. 나도 포함해서 너까지 같이 합세하면 더 크게 생길 수 있게 되는 걸까. 지후는 붕대로 감긴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나을 수 있다면, 다시 달릴 수 있다면야.
내가 너를 생각하고 이긴다면.
“...한번.. 해볼게.”
어쩌면 두 번째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던.
***
“야 주장!!”
“! 깜짝이야...”
혼자 띵구같이 앉아서는 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 거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 쪽으로 지후가 고개를 기울이면, 옷에 흠뻑 젖어있는 수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훈련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라. 짜증나게, 삘 좀 오고 있었는데. 수건으로 제 머리를 탈탈 털어대는 모습이 익숙했다. 지금까지 훈련하고 있었구나.그럼 내가 놀고 있었겠냐? 다음 경기가 코앞인데.
“주장 너야말로 땡땡이치는 건 아니지?”
“아냐, 그냥 좀.. 생각할게 있어서.”
“네가 생각할게 뭐가 있다고....... 설마, 다리 아파?”
비만 오면 너 더 더디게 달리잖아. 수유 그녀와 어울리지 않게 퍽 걱정스러운 말투가 섞인 말이 들려오자 지후는 제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다니까. 몇 년이나 지난 게 또 아프겠냐? 걱정도 참 많아요. 비글 같은 게. (누가 비글이야! 너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이고야, 내가 너 다시 걱정하나 봐라. 재수 없는 주장.” 터덜터덜 눈앞에 있는 그를 몇 번 씩이나 욕을 되씹으며 수유가 투덜거렸다. 사람 욕은 본인이 없는 곳에서 좀 하지? 라고 말하면 곧장이라도 때릴 듯이 고양이 같은 눈초리가 지후를 쏘아보았다. 그러던가 말던가. 지후는 제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유롭게 수유의 시선을 피했다.
아오, 내가 말을 말지! 결국 몸을 돌린 것은 그녀 자신.
산수유. 젖은 머리카락을 시원스레 털어내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 지후는 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오는 날.
어쩌면 같이 떠오를지도 모르는.
지난날의 산수유 열매 하나.
9. 가람 관답록 (2015.02.25)
뭐야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리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나지...?
“글래스 후! 어디 가는 길이야?”
“좀.... 꺼져요!”
퍽! 들고 있던 일정표로 들고 있던 은색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꽤 강하게 그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유난히도 밝은 얼굴로 지후를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프다는 고통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지후는 질린다는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웃음병이 도진 건지 실실 웃던 가람은 왜 그래? 라며 묻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글래스 후는 자꾸 까칠하게 대한다니까.”
“얼마나 귀찮으면 까칠하게 대할까 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웅! 전혀 안 했어!!”
쿵!! 이번엔 가까이 다가오던 그를 지후가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아야야... 이번엔 나름 아팠던 모양인건지 가람이 맞은 부위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끙끙 앓았다. 그럼 그 멍청하게 골빈 머리. 이제부터라도 좀 굴리시면 되겠네! 가람을 싸늘하게 응시하던 지후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람 때문에 몇 년을 더 빨리 늙어가는 기분이야.
짜증나게 거슬리는 드래곤윙즈에는 정말로 걸 맞는다 할 만큼 짜증나는 놈들밖에 없다. 앙숙 중의 앙숙인 무주장만 생각해도 저절로 열이 오르는데, 왜 이 사람까지 생각해서는 나머지 화까지 다 내야하는가.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꽃을 달며 쫓아오는 가람이 지후는 치가 다 떨릴 정도로 싫었다. 어쩌다 이 사람이랑 엮이게 된 거지? 심지어 이 사람은 이글타이푼즈 근처에 자주 놀러오기까지 한다. 축구를 하면서 정신을 차리면 붉은 게 옆에 나타난 것 때문에 심장을 졸이게 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고. 도대체 당신은 당신네 팀에 가서 연습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라며 소리를 내질러도 돌아오는 건 헤프디 헤픈 웃음 가득한 얼굴 뿐이었다. 귀찮아, 진짜 귀찮아.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움켜잡으며 지후는 끙끙 앓았다.
“에이! 좀 튕기지 말고! 응? 글래스 후^ㅡ^”
“.....아, 아아악, 악 죽어! 그냥 죽어!”
결국 싱글벙글 또 쫓아오는 통에 손에 잡히던 공으로 가람을 향해 걷어차버리고 말았다. 맞은 탓에 또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웃는다. 계속 웃는다. 얼굴 표정이 웃음 밖에 없는 걸까?
혹시 계속 짜증이 나던 이유는
“야, 주장.”
“??.... 왜 선배.”
상연은 어딘가 불편한 얼굴로 지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해하던 지후는 다가온 상연을 올려다보며 물음표를 띄운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는 거야? 혹시나 싶어 그에게 되물었지만 연한 노랑의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입을 여는 것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 걸로 대답한다. 그러면 무슨 일인데.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 망설이는 듯한 상연의 모습이 어쩐지 답답하고 열이 나 지후는 싸늘한 말로 그를 재촉했다.
“아니, 너 말이야.... 정가람 좀 생각해달라고.”
재촉에 겨우 입을 연 상연은 의외의 인물을 입밖으로 꺼낸다. 혹여나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지후는 자신의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누구? ... 정가람! ...누구?? ...드래곤윙즈! 매일 우리 팀 찾아오는 애 있잖아!
그의 이름을 담아낸 것이 쑥스러웠던 것인지 상연의 얼굴이 유난히 붉어보였다.
“??????”
“걔 얼굴에 멍이 들었던... (화끈) 적당히 좀 때리라고!”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매일 보니까 알지! 얼마나 신경쓰이는데”
“????????????”
왜 선배가 신경이 쓰이는데? 의문이 드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선배도 가람 선배 오자마자 가장 먼저 튀어나와선 놀리고 투닥거리기 바쁘잖아.
설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짧은 생각 하나.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윽.....”
“?????????”
왜, 왜 당황한 것처럼 얼굴이 더 빨개지는 건데? 나도 선배가 그런 반응을 보니까 괜히 당황스러워지잖아. 라고 생각했던 말은 입밖에 내뱉지 못하고 다시 머릿속은 상황파악을 위해 굴리고 또 굴리기 시작한다.
설마
서얼마
“그, 그래! 우리 사귀는 사이다!”
“?????????”
그러니까 애 좀 때리지 마라! 그래도 네 선밴데! 겨우 말한 것이 뿌듯했는지 상연의 빨개진 얼굴에는 미소가 서렸다. 아니 뭘 저렇게 당당하게 말한담. 얼이 빠진 지후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머리를 돌리고 또 돌려야만 했다. 그래서, 선배가 누구랑 사귄다고요? 기억 저편으로부턴 제게 공을 맞고 헤실헤실 웃음을 터트리는 드래곤윙즈 가람 선배의 모습이 떠오르고. 사고회로는 천천히 멈추게 된다.
선배 애인?
상연 선배 애인?
최상연 애인이라고????
그러니까, 상연 선배랑 가람 선배가 사귀는 사이란 말이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납득이 되고, 그 다음 부터는
열이 오른다.
“그 선배는 선배 애인이어도 내 샌드백이야!”
“야, 말이 좀 심하... 악! 왜 때려!”
“그러니까 선배도 내 샌드백이야.”
“무슨 논린데!”
그만, 그만 좀 때리라니까! 비명을 질러대는 상연을 힘껏 때리는 지후에 결국 지나가던 이글타이푼즈가 겨우 말리고서야 그 난리통도 해결이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글타이푼즈와 드래곤윙즈가? 정말로? 어쩐지 옛 앙숙의 웃음이 떠오르는 것만 같아 지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팀 내에서 가장 관리하기 힘든 사람이랑 팀 외의 라이벌 팀 안에서의 가장 짜증나는 사람이 서로 사귈 줄이야...
아, 또 생각하니까 편두통이.
.....이 징글징글한 샌드백 커플.......
그만 좀 괴롭히라고!
10. 마리오네트 (2015.02.25)
이대로 끝?
“메이르 선수....”
감독이 새로 바뀌었다. 보통이면 매년 달라지는 감독이기에 이글타이푼즈 내는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바뀌게 된 감독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불쑥 등장해버렸기 때문에 팀 내는 또다시 혼란의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떠들썩한 팀 분위기는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되러 반감만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 왜 하필 이 자리에 당신이 서게 되었는가. 지후는 얼굴에 가득 불만감을 호소했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어쩌면 다소 어린애다운 경계일지도 모르는.
“그럼 일일코치로 생각하던가.”
어느 쪽이든 나는 상관없어. 너희들을 똑바로 가르쳐주기 위해 온 건 변할 게 없으니까. 지후와 같은 생각을 가진 팀원 몇몇이 대들었던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이 꺼낸 말 중의 하나였다. 아니, 이 상황에 감독이 오지 않는 지금 당신이 새로운 감독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치를 한다고 하더란 들 우리와 같이 있겠다는 건 같은 의미이지 않는가. 도대체, 어째서 무슨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 들어있는 의문은 쌓여만 갈 뿐 오늘도 꾹 눌러 참은 채로 지후는 멀리서 그를 응시했다.
메이르. 그 유명한 엘레멘탈 그룹의 현 회장이자 전 이글타이푼즈, 타이거킹즈 및 현재 빛을 발휘하고 있는 미래 성 가득한 축구 선수. 매 경기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느꼈던 생각. 그라운드 가장 중심에 서있는 당신은 눈이 아프도록 빛이 난다. 어둠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가지각색의 무지개 색깔. 굳은 흑으로 칠해진 나와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 당신. 그림자와 다를 게 없는 나로선 전혀 그 근처조차 발을 내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글타이푼즈에게도 멀고 먼 당신의 존재는 심히 거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 뿐. 어쩌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걸지도 모르는.
“저는 당신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비뚤어진 졸렬함인가.
✿ ✿ ✿ ✿ ✿
조금만 더 달리도록 해주세요.
미련하고 쓸모없는 제게 한 가지의 기회를, 희망을 안겨주세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한 나무토막 인형이 망가져버린 이야기.
하얗고 하얀 병원에 쳐 박히고 난 뒤에는 실망감이 가득 담긴 눈이 지후의 온 몸을 훑어 내려갔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를, 할 수 없다는 강한 압박이 비참하게 눌러버리고 말았다. 흐린 눈망울로 겨우 물체를 바라보던 그 시절, 그 때. 인형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 만다. 일어나고 싶다며 아무리 빌어보았지만 속으로만 쌓여가던 작은 엉켜진 굴레는 벗겨낼 수 없었다. 천천히, 또 천천히 아래로, 또 아래로. 알 수 없는 미래만을 떠올리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희망이란 없었다.
다리는, 천천히 숨을 죄어가고 눈을 가린다. 다리는, 천천히 숨을 죄어가고 눈을 가린다. 살려주세요. 라고 작은 발버둥을 쳐보자. 돌아오는 건 한숨어린 부모님의 시선과 싸늘한 병실 안의 차가운 반응들 뿐. 어린 지후는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작은 아이의 손이 작은 아이의 눈을 가려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귀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는 막지 못한다. 자 그럼 이제 베개에 눌러 붙어 소리를 막아보자. 그러면 이제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한 후에는 잔인한 적막감이 찾아온다.
아무도 없는 듯 마냥 조용하게 울리는 병실 내의 정적은, 작은 아이의 상처를 찢어 내버린다.
“도와줘.“
헐떡이며 꺼낸 세 글자는 정적과 함께 사라져가고
‘날 이기게 만들어줘!’
‘오래 달리지는 못할 거야. 괜찮겠니?’
두 선택의 가로 속에 고민하던 작고 작은 그림자 아이는
‘이기고 싶지?’어느날 찾아온 한 남자 덕에 나무토막 인형은 조금씩 묶이고 묶여 겨우 일어서게 될 수 있었다. 가느다란 실로 겨우 연명하는 나는야 낡아빠진 마리오네트. '이기게 해줄게.' 하지만 원하는 걸 얻게 될 수만 있다면 나를 쓰레기처럼 버려도 좋아. 개처럼 굴려도 좋아.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다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승리를 위해서라면, 낡아빠진 인형은 다시 일어날 수밖에. 다 아물지 못한 상처는 저 깊이 숨겨버리고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난다. 활짝 날아오르던 날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겨 조각조각 나뉘어져 버려졌다. 하지만 솜털같이 작게나마 존재하는 날개조각은 아직 안에 숨 쉬고 있다. 이것마저 없어지기 전에 다시 날아야만 한다.
안녕, 다시 돌아온 나는
승리에 더럽게 집착하는 질척한 나무토막 마리오네트.
선택하게 된 길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그라운드에 올라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먼 인형은 앞으로의 일은 생각조차 하지도 않은 채 조금씩 더 어두운 물 안으로 잠겨들어갔다.
✿ ✿ ✿ ✿ ✿
어쩌면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욕심이 화가 되어 같은 불구덩이에 내던지게 된 것이라고, 다시 악몽은 돌아왔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부터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고 그 정 반대방향에 서있는 건 당신이었다. 아이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에 대한 벌이라고 넘겨짚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너희들한텐 어쩔 수 없는 빚이 있으니까”
“그걸 갚으려고 온 거야.”
하지만 마지막 건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잔뜩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이 곳에서 지게 된 빚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런 건 어린애들이 알 필요 없는 문제지.’ 라고 기각을 당해버렸다. 틈만 나면 어린애 이야기를 꺼내시는 군. 우습게 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오지랖이 참 넓으시네요.”
“칭찬으로 듣겠어.”
가득 자신만만하다는 얼굴로 갑작스레 우리들 앞에 들이밀며 나타난 당신을, 나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건 지금까지 수많은 감독들을 향해 가진 생각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지후는 고개를 치켜세우며 지지 않겠다는 것 마냥 제 의지를 드러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리게 된 것은 작은 실수. 그는 여전히 가소롭다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들어 애송아. 나는 너랑 싸우자고 여기 온 게 아니야.”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찾아오신 목적이라도 제대로 말씀해주셔야..”
“말했잖아. 속죄하러 온 거라고.”
이제부터 감독님이 될 사람한테 자꾸 같은 말만 되물어본다? 조금 더 특별하고 각색하게 질문을 던져봐. 비꼬는 것 마냥 쏘아붙이는 말에 지후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뻔뻔하고 자만스러운 사람. 그 또한 저를 향한 생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모양인지 지후를 쳐다보던 그가 제 파란 머리를 털어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 애랑 말싸움 하는 취미는 없다? 또, 그렇게 어린아이 취급을 할 생각인가.
그런 얼굴 좀 하지 말라니까? 지후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던 메이르가 이어 말했다. 그래도 일단 감독과 주장 사이야. 티는 내지 말자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훈련도 시작될 거야. 주장인 네가 잘 따라와야 애들도 본받지. 안 그래?”
“...훈련을 안 한다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따라잡을 겁니다. 어디 한 번 당신 방식대로의 훈련과 전술을 내게 알려줘 봐. 눈 깜짝할 사이에 익혀낸 다음에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남자냐며 잔뜩 비웃어줄 테니까.
‘라고 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훈련은 장난 아니게 힘이 들었다. 어느 감독님들 또한 못지않았다. 더한다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지후는 열이 담긴 숨을 불규칙하게 내쉬어가며 흐르는 땀을 계속해서 닦아냈다. 역시 감독 일은 제대로 한다는 건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씩 봐주며 코치해가는 그를 바라보며 지후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겨우 숨을 다 고르고 난 뒤에 아이들을 훑어보기 시작한다. 대부분 한 쪽에 모여서 늘어져있다. 본인 뿐만이 아니라 훈련에 익숙해지지 못해 지쳐 탈진한 모양이었다. 그 중에도 가장 눈에 보이는 건 구석에서 공을 들고 누워있는 채로 끙끙 앓고있는 에이스 스트라이커의 모습. 평소 눈에 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반사적으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레이 선배. 라고 부르면 눈을 감고있던 그가 제 쪽을 향해 살며시 떴다.
“훈련 어땠어? 엄청 놀림 당하던 건 보이던데”
“그 아저씨.. 절대로 복수 할 거야..”
잔뜩 고되게 당한 모양이었는지 숨을 헐떡이던 그가 한 쪽에 다른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향해 힘없이 삿대질을 했다. 확실히 이 중에서 그와 가장 많이 붙은 건 다름 아닌 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였을 것이다. 이빨을 세우지도 못하고 당한 꼴이 우스워져 지후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푸흐흐... 천하의 솔레이가...큭.....”
“웃즈므르.... 내가 뭐.. 이런 거 처음 보냐..”
“이렇게 풀어진 건 처음 보지.”
언제나 힘든 훈련이 끝나도 벌떡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켜 여유 만만한 티를 보이던 선배가 이런 식으로 늘어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고. 선배 자신도 이상한 느낌 안 나? 수유가 보면 웃겠어. 잔뜩 놀리는 말을 써대는 후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솔레이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네가 그 무식한 아저씨랑 1 : 1로 해봐. 아무리 둘다 선수라도.. 고등학생이랑 성인이랑 같나.”
“후... 게다가 뛰어난 프로선수지. 아, 그 사람 갈 때까지 선배랑 쭉 1 : 1 해달라고 부탁이나 해볼까.”
“스물 여덟이면 슬슬 은토를 고려해야 하지 않아? ....흐즈므르....”
이를 악물며 노려보는 모습이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서른 중반까지는 튼튼하지 않을...풉...푸흐흐....하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배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크게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그 모습에 의아했던 건지 솔레이 그는 묘한 표정을 지어내보이더니 휘청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지후의 이마에 손가락을 툭 쳤다. 웃지 마라. 평소엔 잘 웃지도 않는 놈이. 하지만 목소리에는 전혀 화가 난 기색이 없다. 지후는 어깨를 으쓱거림과 동시에 눌린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웃기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래라, 그래. 선배 호되게 당한 꼴 보면서 실컷 웃기나 해버려라. 불만스럽지만 다소 장난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던 솔레이가 아이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몸을 옮기려 하다 잠시 멈칫하고는 지후의 앞에 섰다.
“그래서, 넌 훈련 어땠어?”
“평소에 안 쓰던 몸을 집중적으로 움직이니까 몸이 아파. ..하지만 뭐, 곧 익숙해지겠지.”
내가 안 익숙해지는 훈련이 어디 있겠어? 지금까지 해왔던 걸 생각해 봐. 그 많고 많던 감독들을 가볍게 손에 주무르고 다녔었다. 어쩌면 나름이 자부심일 지도 모르는 일. 그 어떤 훈련이든 전술이든 잔뜩 삼켜내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내뱉어야지. 선배도 나 믿지? 내가 제대로 못하는 일은 없어. 이번에도 어떻게든 메이르 감독의 훈련과 전술을 빼앗아서 경기에 이용하도록 할 거야.
어린 후배의 말을 잠잠히 듣던 솔레이는 자신의 뺨을 문지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주장
“네 말은, 다음 시합에서도 이기겠다는 말이네?”
“....!.....”
“지시를 안 듣고.”
“....선”
“나야 뭐 이기면 그만이니까.”
주장인 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아줬다면 고맙기야 하지. 흠, 짧은 웃음을 흘리던 솔레이는 지후의 머리를 툭툭 작게나마 쓰다듬더니 손을 흔들고는 골대에 늘어져있는 수유 쪽으로 몸을 옮겼다. 결국 아무런 대답을 하지도 못한 채 그를 돌려보냈다.
‘실은 마음을 열어준 거 아냐?‘ 훈련이 시작하기 전, 그가 꺼냈던 작은 말 하나. 어느 쪽이든 대답할 수 없었기에 한심하게 묵인으로 말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나는 정말로 다음 시합에서 지시를 받지 않고 이길 생각이었던 것인가. 본인조차도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을 눌러내며 지후는 혼란스러운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감독님은 왜 저희를 찾아오신 건가요? 솔직히 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에게 어쩔 수 없는 빚이 있어서 온 거라고.”
그것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으시는 주제에 감독 노릇이라니... 당신은 저희가 그걸로 아,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라는 말을 내뱉는 개가 될 줄 알았나요? 폭풍으로 쏘아붙이는 말에 그는 살짝 놀란 얼굴로 지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놈이 갑자기 왜 이리 심통이 났나. 보나마나 이런 생각이겠지만. 물론 돌아오는 대답도 애매하고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설명해주면 납득하고 순순히 따라와 주기라도 할 건가? 라고 말하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눈초리로 계속 날 바라보고 있는 한 그렇지 않겠지. 안 그래? 그를 향한 지후의 눈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본인조차 짐작되지 않았다. 지후는 저도 모르게 제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어쩐지 제가 우습다는 느낌이 한 번에 전해지는 것 같아 분노가 아렸다. 이를 꽉 악물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맞습니다. 전 감독님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거에요. 적어도 인정하기 전까지는.”
“뭐,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지켜는 볼게.”
자신감이 하늘을 뚫고 갈 기세다 정말. 이제는 질릴 정도였다. 것보다 지켜보겠다니. 앞으로도 계속 감독 일을 하겠다는 말인 건가.
“질문을 조금 바꿔보도록 하죠. 당신은 우리 팀을 위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팀을 위해? 뭐... 위에서 내리던 그 지시를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는 역할, 정도려나?”
위에서 내려오던 지시. 심지어 이 사람은 우리 이글타이푼즈 내에 일어나던 일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어르신들에게서 온 감독이 아니라면 절대로 쉽게 알 수 없는 정보일 텐데 어째서 당당하게 이 사람은 알고 있는 걸까. 지후의 눈이 살짝 매섭게 빛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는 역할이라. 그렇다면 당신도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럼 별반 차이가 없어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어르신도, 당신도요. 그러자 당신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드러내보이며 지후를 툭툭 건들였다. 어이, 꼬맹이. 사람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듣고 말하지 그래?
“내가 감독이라는 자리에 있는 이상, 너희들이 원하지 않는 지시를 내리거나 하진 않을 거야.“
‘어째서...’
그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건가. 도와주겠다니, 밍밍한 수호천사도 아니면서. 그거 참 친절한 감독님이네요. 과연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지후가 마저 다 입을 열지 못하자 그는 힐끗 바라보며 반대로 되물었다.
“넌, 그들의 지시에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가장 흔들리게 만드는 질문에 또 말문이 막힌다.
‘당신 같은 그런... 감독은 지금까지 없었어.’
“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팀을 이끌어야 할 주장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그런 어정쩡한 마음가짐으로는 제대로 뛸 수 없단 거, 잘 알지 않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후를 바라보았다.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크게 상처를 안겨준 말이었기에 지후는 아린 제 가슴을 움켜쥐고 땅 아래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럼 팀 목숨이 달린 시점에서.. 당장 결정을 내리라는 건가요? 깊은 한숨이 쉬어 나온다.
“어느 쪽이든 저희들에게 독이 됩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어쩌면 당신을 의지하는 걸지도 모른다. ‘실은 마음을 열어준 거 아냐?’ 라고 물었던 솔레이의 말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나는 정말로 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인가. 나의 질문에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꺼낸다.
“너, 주장이라고 너무 부담감을 지니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혼자 끌어 안고 있는 거, 팀원들과 함께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또다시 정곡. ...정곡이네요. 힘이 빠진 것 마냥 웃어버렸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정확하기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 지금까지 혼자 쭉 생각하고 고민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메이르 감독 말대로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 끌어갔다. 미련한 짓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들에게 제 마음을 열어낼 수가 없었다. 의지하지 못해서? 믿지 못해서? 누굴 의지하지 못하고 누굴 믿지 못하는 걸까. 사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뻔히 정해져 있었을 텐데.
이번 지시에도 갈팡질팡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혼자 떠돌아다녔다. 그로 인해 트러블이 생기고 갈등이 싹트고 말았다. 넌 너무 혼자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게 더 안 좋은 거 몰라? 언제 누가 꺼냈던 말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과 함께 이기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라고, 변명 아닌 변명으로 얼버무리고. 결국 그라운드 위에서 실로 엮이고 엮여 행동하던 건 지후 본인뿐이었다. 인형은 언제까지나 인형이야. 낡고 낡아빠진 인형은 조종사 아래에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까지 인형으로 만들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그걸 잘 알면서 뻔히 졸렬하게 행동하던 자신. 도대체 네가 하고 싶어 했던 건 무엇이었나.
“나라면 팀원들이 원하는 쪽으로 할 거야. 그것이 독으로 된다 하더라도 말이야.”
당당하게 팀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메이르가 부러웠다. 나와는 정 반대인 사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당당하게 변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하지만 감독님 말씀대로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있을까요. 저도, 아이들도.”
달라질 수 있을까. 이것은 작은 투정
“꼬맹아, 네 주변엔 널 믿고 도와줄 녀석들이 있어. 그 녀석들을 믿고 맡겨보라고.”
언제까지 혼자 철없이 안고 다닐 생각이야? 그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 결국 그대로 맴돈 채로 끝나게 되는 거야. 네 주변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한 명도 믿지를 못해? 그러다가 병만 생기지. 메이르는 지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장난스레 말해보았다. 하지만 눈만은 변하지 않고 올곧은 채로 지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말대로 정말 변하는 게 하나도 없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여 독이 된 쪽을 선택한다면?
“너는 분명히 후회할 거다. 멍청하게.”
후회하게 될 길을 원하지 않은 채로 선택당하게 될 바에는, 네가 먼저 원하는 쪽으로 가야하지 않겠어?
“이제 그만, 어른들 놀이에서 나오고 어린이답게, 너다운 축구를 해. 이만 인형처럼 사는 것도 끝낼 때가 됐어.”
미련한 인형극을 이제 그만 끝내보도록 하자. 새롭게 나타난 희망은 어린 마리오네트에게 작은 가위를 손수 품에 안겨주고 있었다.
마주한 보라색 눈동자는 반짝반짝 별같이 빛을 발휘하고 있다. 별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고 순간 바보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감독님.”
“엉?”
“정말 싫습니다 당신.”
“...이 꼬맹이가...”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
내가 정말로
당신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고쳐가야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걱정 또한 산마냥 크다.
두껍고 날카로운 실타래에 묶여있던 나무토막 인형 하나는 드디어 작은 가위 하나를 찾아냈다. 싹둑싹둑, 이제 그만 몸에 얽혀있던 실들을 잘라내가자. 이제 그만 혼자 다시 쓰레기통에 나와 움직여보도록 하자. 아주 오래 전부터 했어야 할 나의 일들을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쌓아나가자. 얽힌 실들은 많고 많아서, 한꺼번에 다 자르기에는 힘들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자를 수 없는 것도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안녕 안녕. 마리오네트.
나는 정말로 자유로운 나무토막 인형. 자, 일어나. 흑으로 묻혀있던 자신의 색을 예쁘게 칠할 시간이 다가왔어.
천천히,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어린 소년이여.
12. 상연가람 가람상연 선물로그 (2015.02.27)
상연ts가람 : 나만 특별하게 대해주면 안돼?
“너는 지나치게 여자에게 상냥해.”
“너도 여자잖아.”
나 말고 나를 포함한 여자 전부 말이야. 사귀기 전에도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가림은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제 남자친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잘생겼다. 매너도 좋고, 축구도 잘한다. 어떻게 보면 그 점에서 가장 먼저 호감에 들었는지도 모르지. 본인에게도 항상 매너 좋고 따뜻하게 대해줬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매너가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여자애들에게도 향하는 점이였다! 이 여자만 밝히는 놈아! 뭐?! 다시 얘기해 봐! 그것 때문에 질투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 탓에 사귀기 전에도 자주 투닥이게 된 것 같았다.
겨우겨우 힘들게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병 같은 증세는 고쳐주지 못했다. 왜! 올 때마다! 다른 여자한테 시선을 두는 건데! 풀이 죽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부족한 얼굴 때문에 그와 만나러 갈 때도 거울을 수십 번씩 보고, 옷도 매일 같은 것만 입으면 없어 보일까봐 데이트 할 때도 매번 옷장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본다.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슬슬 나만 봐줄 때도 됐지 않아? 라고 물으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예의상 한 번이라도 봐줘야 해! 그게 남자의 의리야!’
잘도 의리다 이 나쁜 놈아
“난 네 여자친군데.... 왜 다른 여자애들이랑 똑같은 취급을 받는 거야..”
“누가 똑같대.”
“똑같다고! ...여자친군데 가끔은 특별하게 대해줘도..”
역시 너 날 여자친구로 봐줄 마음은 쥐뿔도 없는 거지? 먼저 고백한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야? 너는 잘생기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도 상냥해서. 그것이 나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내가 먼저 고백하고, 너는 원래 여자에게 유난히 친절한 남자니까 이해하자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힘들고 괴로운 건 도저히 변하지가 않아. 그녀는 제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런 가림을, 아까부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건 다름아닌 그녀의 남자친구인 최상연.
"...야, 정가림!“
사람 진짜 귀찮게 만들고 있어! 잔뜩 기운이 없는 그녀를 향해 상연은 소리치는 듯 하더니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가림이 다가오는 상연을 눈치 채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에게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쪽. 하고 맞추어진 서로의 입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 한참동안 그녀에게 제 입술을 누르고 있던 상연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특별하게 대하고 있잖아.”
“....”
“이렇게 해주는 여자는 너밖에 없거든?”
부끄러우니까 이 이상 말하게 좀 하지 마라! 어느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연은 얼굴은 마치 토마토 같았다.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정말. 툴툴거리는 그는 어느새 저만치 걸음을 옮긴 뒤였고, 가림은 그에게 받은 입맞춤을 되새기기라도 하는 듯이 제 입술을 매만졌다. ...대박!
그녀의 얼굴은 잔뜩 함박꽃이 피고, 그의 얼굴은 잔뜩 토마토가 열매지고. 뭐, 나름 해피엔딩이지!
야-! 최상연! 우리 데이트하러 가자! 풀이 죽은 건 언제고, 가림은 신이 난 얼굴로 그에게 총총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 역시 너무 좋아 최상연♥ 그래도 여자한테 시선 두지 마. 가만 안둘 거야♥
가람ts상연 : 나는 남자가 좋다. 하지만 남자인 넌?
틈만 나면 시비를 걸고, 틈만 나면 우리 쪽으로 튀어나온다.
“야! 최상순!”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언제 또 본명을 알아내서는 매번 그렇게 불러대고. 상순이가 아니라 하연이야 하연! 씩씩거리며 화를 내도 멍청이같이 털털한 웃음으로 넘겨짚고는 한다. 드래곤윙즈고, 성격도 뭣도 안 맞아서 열이 받는 남자아이. 좋아해야 좋아할 수가 없어서 다른 남자들처럼 티를 내기도 전에 그에겐 솔직한 마음으로 짜증부터 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남자. 좋아할래야 좋아 할 수가 없다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이글타이푼즈 쪽으로 와서는 귀찮게 만들어버린다. ‘자, 가라 주장! 주장의 힘으로 내쫓아버려!‘ 라고 말했다가 얻어맞는 경우도 허다했다. 씨이, 이게 누구 때문인데! 또다시 둘이 투닥이고, 혼나고, 투닥이고, 또 혼나고.
나는 남자가 좋다. 하지만 남자인 넌?
‘괜찮아?’ 아파서 눈앞이 핑핑 돌고, 너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된 시점에서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았다. 차갑다. 하지만 차가워서 기분 좋아. 흐리멍텅한 눈을 게슴츠레 떠 이 손의 주인을 찾는다. 끝에는 익숙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자애가 비 내리는 곳에 계속 뛰어다니니까 감기가 걸리지.' 남이사...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른 입술은 도저히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좀 푹 자라. 죽 가지고 올게. 끝자락으로 떠오른 생각 하나. 너는 참 상냥하다. 어쩌면 그 때부터 너를 조금 다르게 생각했던 걸지도.
‘최상순~! 뭐하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치마 좀 늘려라-! 뭐가 그렇게 짧아?!’
‘여자애가 몸 차갑게 하면 안돼. 이거 입어!’
너는 쭉, 질리도록 나만을 챙겨주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다른 여자애는 보이지도 않나보지? 이상하게 그 상황에서 드는 건 의문보단 기쁨이 더 커서.
그리고 그 상냥함이 오로지 나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땐. 이미 너는 내 옆에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아채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가람은 매일 하연을 만날 때마다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붙잡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기분 좋고, 또 듬직하다. 바보같이 설레는 마음은 지워지질 않는다. 항상 고개를 치켜세우면 마주하고 있는 건 은발의 귀염성 있는 얼굴인 남자. 정가람. 하연은 제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내가 남자를,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지. 그 누구도 없었어, 너를 제외하고는.
“야 정가람!”
“왜?”
“조... 좋아한다고!”
나 또한 너를 향한 감정을 참아낼 수가 없었어. 난 남자가 좋다. 하지만 남자인 넌?
'더 좋아해.'
물론 창피하니까 말은 안 할 거야!
13. 생각의 정리 (2015.02.28)
1. 끝의 마무리는 (무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렸을까.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내쳤을까.
후회 가득한 생각 깊숙히, 문득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인 무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코 좋지 않은 길을 밟으려는 그 때, 항상 지후에게 이를 드러내보이던 평소와는 다르게 그는 온화한 얼굴로 지후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너는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거냐?' 어떻게 보면 그가 친구인 지후에게 가장 먼저 처음으로 건네주었던 걱정이 담긴 물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지만 제게 말을 건넨 무주에게 드는 생각은, 본인을 걱정해준 감사의 마음 대신 오직 그가 짜증나는 분노만을 느꼈던 지라 지후는 괜한 오기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걸로 만족하느냐고? 설마 이 정도로 본인이 만족할 것으로 보였던 건가. 지후는 헛웃음을 치며 그를 향해 욕을 읊조리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냐. 하지만 곧 만족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거든. 라는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 하지만 무주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런 반응이지만, 그래도 화는 낼 줄 알았는데. 어딘가 아쉬운 반응과 함께 지후는 결국 그에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무주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지후 또한 변함 없었다. 자, 그렇게 천천히 우리 사이는 갈라졌을 것이라. 다시는 붙여질 수 없도록 멀어져가며.
그리고 현재. 더 이상 감정 없는 서로간의 사이가 되가면서. 나는 여기까지, 너는 이곳까지 도착했다. 자 그럼 종착지는 어느쪽?
너는 설마 이것을 예상하고 나에게 그런 얼굴을 지었던 건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구름 한 점 올려다보지 못하더라. 무주가 그토록 계속해서 주장하고 외치던 것이 이제서야 지후에게 닿아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멀리, 늦게서나마 닿아버리고 말았어. 하필 지금.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가는 마당에 알게 되어버린 지금, 죄책감은 수백 배로 커져나간다. 지후 본인이 쌓아왔던 죄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고개를 제대로 치켜들고 그와 맞서 축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다 깨달은 뒤에도 말이야!
무주와, 드래곤윙즈와 축구경기를 한다. 너는 조금 오묘한 얼굴로 다른 아이들과 공을 주고받고 있다. 그런 너에게 공을 뺏으러 가야 할 것은 나였다. 안지후였다. 작년의 굴욕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난 뒤 너를 천천히 밟아주어야만 하는 것이 나의 올해 목표였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싶을 정도로, 진한 남색의 머리카락을 눈에 담을 때면 부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여서는 결국 드래곤윙즈 윙어와는 먼 쪽으로. 네가 없는 쪽으로. 분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빨리 움직여줘!'
나무토막 인형은 뭐가 그리도 겁에 질렸는지. 결국 가만히 부동자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너와 나는 16살 축구 경기를 끝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난 너를 이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넌 나에게 졌다.
모순되는 우리들의 사이와 축구.
"무주.....무주야!"
".....안지후 너"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다.
정정당당히 너처럼 이곳을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까. 얼굴을 차마 네 쪽으로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상 이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하더란 들, 그건 절대로 이겼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없는 축구. 모든 걸 알았다고 생각하니 이번 경기에서 제대로 뛰었다고 해도, 너에게는 할 수가 없었다. 지후는 입을 다물고 그를 천천히 응시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런 그를 보자니 어쩐지 옛날의 저에게 의아한 질문을 던졌던 무주와 겹쳐보이는 것 같아서. 지후는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걸로 데쟈뷰를 느끼고 싶진 않았는데.
"....이겼다. 이긴다고 말했었지?"
"알아. 설마 내 입으로 축하한다는 말 들으러 온건 아니지?"
"설마. 바라지도 않았고. ....그냥 말하고 싶었어."
네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하지만 이번엔 예상한 바와 같이 여전히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래, 나도 너네를 축하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오늘..... 시합처럼 해서 우승까지 한다면 몰라도."
테러리스트.
무주야.
어쩌면 네가 그 때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할 거야. 내년에는 반드시.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겠지"
우리한텐 내년이 마지막이잖아.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이번엔 쓰레기처럼 버리지만은 않겠어.....하지만 만약 내가 네 말을 단 한 번이라도 귀기울여 들었다면, 나에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앞을 향하자.
2. 결정이 되었다. (산수유)
그 많던 산수유는 누가 다 먹었나.
"야!!"
"....시끄러워."
"왜 여기에서 디벼자고 있어?! 시합 끝난지가 언젠데!"
다들 너 찾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수유의 목소리에 지후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무주와의 이야기를 끝낸 후 휴개실에서 못다한 피로가 쏟아져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망정이지! 쪽팔리게 뭐하는 거야! 늘어져있는 지후를 일으켜주며 수유가 그의 등을 퍽퍽 때렸다. 또 골키퍼의 힘은 무지막지 하기에. 지후는 작은 비명을 뱉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하는 거야!
"잠 좀 깨라고 해봤다. 왜!"
"지금 종일 뛰어다녀서 근육 뭉친 거 안 보여?! 아프다고!"
"엄살은 또 엄청 심해요!"
그러지 말고 후딱 일어나라. 우리 바쁘다 바빠! 경기가 금방 끝난 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힘이 솟아나는 건지 번쩍 번쩍 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수유가 지후를 질질 끌고갔다. 얘 전부터 생각했는데... 진짜 여자 맞아? 어떻게 남자를 이렇게 질질 끌고가? 잔뜩 의문이 드는 와중에도 어느새 복도까지 그는 질질질. 그냥 알아서 걸어갈게! 버둥거리며 겨우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나왔다.
"아.. 목이야..."
"이제 잠 좀 깨냐?"
"어, 덕분에 엄청."
친절함에 참 감사드립니다. 뻐근해진 어깨를 주물러가며 지후가 투덜거렸지만 수유 그녀의 얼굴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싱글벙글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사람 아프다는데 그렇게도 좋냐? 라고 말하는 지후였지만, 그의 입가에도 입 꼬리가 따라 올라가있었다.
"그냥 우리... 이긴 거지, 그치?"
이기다. 우리가 쭉 원해하고 탐하던 단 세글자. 하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다른 독특하고 묘한 느낌으로 우리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것도 우리가 평소에 하던 플레이 방식이 아닌, 그 누구보다 정정당당하고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플레이를. 수유에게도 지후와 다름없이 특별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던 지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우리 이번 경기 지시대로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우리들은 스스로 개의 목줄을 풀어헤친 셈이었다. 항상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나 와... 내가 이렇게 긴장을 할 줄은.. 진짜 꿈 아니지?"
"꿈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이겼다는 게 왜 꿈이야. 라고 반박하려 나머지 말을 이어하려던 순간, 무주에게도 일어났던 것과 같이 수유에게도 어느 한 인영의 모습과 겹쳐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나빠진 걸까 싶어 제 눈을 비비고, 그녀를 다시 응시한다. 역시나 겹쳐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다. 무엇이 그녀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일까 하고 의문에 잠겨보다
나를 이기게 만들어!
머릿속 당찬 소녀의 말이 하나 떠오른다. 이건 아주 어리고 어리던 우리들이 만들어낸 작은 약속 하나. 그리고 어쩌면, 지금 현재까지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걸지도 모르는 잔인한 약속 하나. 지후는 기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잔잔히 뜯어보았다. 몇 년이 지나도 너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항상 같은 위치에서 든든히 제 자리를 지켜주고 곁에 있어주었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 어떤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대책없이 결론을 지어버리고 네 머리를 툭 하고 쳤다. 수유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지후는 전보다도 밝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말할 수 있었다. 산수유
"옛날에 한 약속은 지켰다."
어쩌면 네게 말하기에 뻔뻔스러울 지도 모르는 말.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짓된 승리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도 이제 가죽을 벗겨버릴 때가 온 걸지도 몰라. 다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드래곤윙즈와의 준결승전. 너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래그래, 하지만 하나 남았잖아?"
키득거리며 그녀는 그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거기에 담겨있는 애정이, 또 지후의 마음에 닿는 격이라서. 어쩌면 이것도 예상했을 지도 모르는 것들 중 하나. 다시 저를 향해 무표정을 지었던 무주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 했다.
그래, 다음에는 반드시.
그리고 앞으로도 쭉.
3. 눈을 떠라 ( 솔레이 & 최상연 )
당연하게 이겨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
나의 두 다리.
지후의 피로에 잠긴 두 눈은 어두침침했다. 경기에 이긴 것은 좋으나 너무 힘을 뺀 것도 사실이었다. 졸린 제 눈을 비벼내가며 지후는 마른 한숨을 차가운 공기 너머로 삼켜낸다. 수유가 그를 밖으로 질질 끌고나오게 만든 후 그대로 팀의 버스 안까지 끌려가 쳐박혔다. 그리고 이글타이푼즈 부실까지 오는 동안 그대로 풀슬립. 자면서도 조용했던 것을 보면 지후 뿐만이 아닌 다른 팀원들도 다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해는 노을이 지고, 지후의 눈을 간지럽힌다. '도착했느니 다들 얼른 일어나고 내려라.'라고 감독님의 말까지도 들려왔다. 각자 침침한 좀비가 된 아이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에서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순서였던 참인 지후도 느릿느릿하게 버스에서 내려오면
부신 노을빛이 다시 한번 지후의 눈을 건들인다. 반짝거림에 결국 제 눈을 비비고 또 비비다보니 어렴풋이 몽롱해져있던 잠을 깨트려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눈을 매만지며 점차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오면 오늘 하루의 일이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그리고 이글타이푼즈는 드래곤윙즈를 이겼다. 기적과도 같은 설욕전을 이겨내면 와닿는 기쁨은 점차 알 수 없는 느낌으로 사그라든다. 우리는 그들의 지시를 듣지 않았어. 이제서야 비로소 개의 목줄이 풀어져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거다.
하지만 그걸로 정말 된 걸까? 정말 지시를 어겨야만 했던 건가. 나쁜 생각들은 이것저것 섞여들어가고, 탄식이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
"정말로 드래곤윙즈를.. 이겼다."
"어 이겼어."
"반친 안 썼다... 근데 이겼다."
"그래, 이겼다고."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지후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왼쪽엔 솔레이, 그리고 오른쪽엔 최상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차 안에서 깊게 잠들었던 모양인지 반쯤 눈이 감긴 채로 몽롱한 얼굴을 지어내고 있었다. 오늘 가장 빛낸 선수들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이겼다는 말에 지후는 작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드는 생각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 기분좋다. 항상 이겨왔던 거와는 달라. 오늘은 조금"
상연도 지후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뒷목을 천천히 쓸어보이더니 쭉 기지개를 피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던 지후는 좀전의 수유가 꺼냈던 말을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다시 꺼내버린다. 안 믿겨진다. ....이거 꿈이야?
"볼 잡아 댕겨줄까?"
"윽... 사양이야. 꿈이 아닌 걸로 치자."
엄지와 검지를 여러 번 맞붙여가며 장난스레 말하는 솔레이에 지후는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꿈이 아니지 바보야! 상연은 낄낄거리며 그의 장단에 맞추어가며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뭐, 선택은 네 마음이지. 그래. 상연을 따라 작게 픽 웃으며 험악하게 치켜올렸던 손도 천천히 내려보인다.
이 선배들은 가끔 죽이 너무 잘 맞아서 귀찮다니까. 그들을 향해 지후는 고개를 또다시 내저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걸로 작년의 치욕은 해소했네. 이젠 호랑이를 잡으러 갈 거냐?"
호랑이. 우리들에게 이를 드러내보인 작은 짐승 한 마리.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큰 존재가 될 수 있는. 지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물음에 응답했다.
"...그래야지. 그 전에 마운틴솔리드와도 붙을 수도 있어."
작년도 4강 팀인데 그렇게 쉽게 신생팀에게 질 팀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 지후의 말에 동감했는지 솔레이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말하면서 키득거리는 웃음 또한 지우지 않고. 너는 어느쪽이든 이길 거지? 또 지후에게 의문이 담긴 질문이 던져진다. 그리고 대답도 뻔하게 나올 거라는 걸 그는 예상하고 있겠지.
"당연한 거 아냐? 이길 거야."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빅엿을 먹여야지."
어르신.
무섭도록 소름이 끼치는 존재에, 나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힌다. 쭉 이번 결과가 나오면서 멍청이같이 헤매고 헤매던 생각 하나하나는. 지후는 제 입술을 다물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숨겨왔던 고민을 뱉어낸다. 저기, 만약 말이야.
"진작에 이렇게 했었어야 했던 걸까?...결국 옳은 건 뭐였지?"
우린 정말로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연상인 그 둘에게 어리광부리는 바보같은 질문일지도 몰랐다. 지후의 이야기를 듣고 상연과 솔레이는 얼굴을 굳히는 듯 했지만 제일 먼저 얼굴을 풀어낸 상연이 제 머리를 긁어내며 짜증섞인 말을 보낸다. 아 몰라!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옳고 그른 게 뭐가 있겠어? 감독님도 그랬잖아!
"맞아.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밀리지는 못할 거야."
"....그렇겠지."
"넌 아직까지 그런 고민만 하고 있냐? 이제 애답게 좀 풀어져라!"
이 졸렬지후야. 졸렬이면 졸렬답게 얼른 지워버리고 다음 시합에 임하자? 보는 내가다 답답할 지경이거든? 지후의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상연이었지만 역시 그 말 안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어쩌면 둘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후의 머릿속을 스쳤다. 야야, 그래도 말이지. 한참동안 그의 머리를 눌러대던 상연이 활짝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레 말한다.
"근데 나 오늘은 네 지시 따랐어. 착하지?"
< 미친, 이제 네 지시는 따르지 않을 거야. >
라고. 말했으면서 상연도, 솔레이도 항상 지후를 믿고 든든하게 뒤에서 움직여주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혼자 막연히 고민하고 눈물을 흘렸던 때가 멍청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보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같다. 어르신들에 대한 생각은 접도록 하자. 이건 나와 선배들과 이글타이푼즈 전원이 결정한 일. 모두가 길을 따른 이상 뒤를 물러날 수는 없다.
이글타이푼즈는 이긴다. 이기는 것 외엔 생각할 수 없다.
"착해. 이제 지시는 안 따르겠다면서.."
"...야! 이 쪼잔한 놈! 아직까지 마음에 그걸 두고있냐!"
"우리 주장이 원래 좀 그렇잖아?"
또 죽이 맞는 이야기가 오고가기 시작하고, 그들을 보며 웃음이 나오는 건 가운데에 있는 지후였다. 어쩐지 무거운 마음도 가라앉고, 덕분에 잡생각이 사라졌다. 이렇게 놓인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반드시 하나 뿐이야.
우승하자.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신뢰하지 않아서 미안해.
선배들의 마지막 시합. 이제는 내가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을게. 이건 망가진 나무토막 인형의 큰 다짐. 맹세. 그 동안 나의 두 다리가 되어주었던 사람들아.
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4. 이제부터 시작이다. ( 주현 )
나의 날개는 꺾였지만 너의 날개은 힘차게 피어오르리.
하늘에 내려온 나의 천사님이여.
"귀 아파 죽는 줄 알았어... 나 넣었다!"
공이 힘차게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글타이푼즈 관중석에서 울리는 환성은 모두 너의 것이었고, 너에게 쏟아붓는 나의 시선도 모두 너의 것이었다. 주현은 살짝 귀를 틀어막는 듯 하더니 크게 두 손가락을 공중에 치켜세우며 신이 난 듯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주장 봤지!!!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은 오로직 지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참 입이 딱 벌어져도 모자랄 너의 충성심과 애정은. 언제나 웃음이 멈추지 않도록 만든다.
현이 너는 정말로 빛이 나는 사람이야.
"고생 많았어 주장...!"
기쁜 듯이 내 쪽으로 달려와서는 너는 소중한 듯 나를 끌어안아준다. 사실 공을 넣은 건 지후 본인이 아닌 솔레이와 주현의 덕이었지만, 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마냥 웃어가며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 끔찍하게도 착한 아이. 안겨진 옷소매를 부여잡고 지후는 살짝 미소지어 보았다. 그라운드는 이글타이푼즈를 향해 강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항상 쏟아지는 비난과 야유가 아닌, 오직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무한의 환호성이. 이 소리를 들어본 건 얼마나 오래된 일이었는가. 소리에 묻혀 제대로 시선을 두지 못하는 와중에, 주현은 지후의 손을 붙잡고 신이 난 듯 소리친다.
"주장! 이제 진짜 결승이야!"
"... 안 믿겨져!"
이게 정말로 꿈이라면,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마지막 순간 만큼은 진심을 다한 우리에게 끝까지 빛이 바라기를. 주장, 우리 열심히 하자? 손을 잡고 주현은 방방거리며 말해왔다. 그래, 조금만 더 열심히.
네가 준 행운을, 모두가 준 행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게 해줘.
같이 열심히 하자? 마지막에도 이렇게 한다면 분명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야! 응원의 메세지를 아끼지 않는 이글타이푼즈의 날개를 올려다보며 지후도 따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아직 이걸로 마무리를 질 때가 아니야.
현아.
"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그라운드를 달려줘."
아직 넘어야 할 고비는 한 개. 이것만 넘는다면 우리들은 분명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 우리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갈기갈기 찢긴 날개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5. 나무토막 인형은 너무나도 행복했답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나의 이야기를 그려가보도록 하자.
너와 나, 다 같이 함께.
나무토막 인형은 더 이상 낡아빠진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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