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호원/해적버스 2018. 8. 24. 23:29

[루라님 생축♥] 끝

루라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해적물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표현력이 이정도밖에 되지 않네요.. ㅠ0ㅠ)9

 

 

 

 

 

 

확신한 건데 이 새낀 암만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팅팅 불어터진 호원의 얼굴을 보며 주명은 생각했다. 지금은 동료들 사이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있다지만, 불과 40분.. 아니 30분 전까지 이 남자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다.


사람 몸의 대부분은 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주명은 생각했다. 오늘 저 놈이 흘리는 눈물은 자기 몸 안에 있는 수분을 쭉쭉 다 빼가 언젠가 눈물에 말라 비틀어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펑펑 울며 자기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거라고, 주명은 생각했다.


그 누구도 호원에게 칼을 겨누지 못했음을 안다. 그는 주명같은 선원에게 있어 세계같은 남자였으며, 그들의 전부였다.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함을 알기에 적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것을 참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칼등을 뽑는 기세라도 보인다면 먼저 목을 졸라 죽였다. 칼날이 베어 있는 발로 서슴없이 이미 숨을 거둔 타인의 몸을 짓밟는다.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게 차호원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넘보지 못하게 할, 우위에 서있는 남자.


그래서 주명은 생각한다. 저 놈을 죽일 수 있는 건 저 놈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요컨대 바로 오늘처럼, 컥컥 막힌 숨을 삼키며 자기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은 것을 보며 죽음을 선택한다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밀어넣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쩌면 호원이 조금 더 극악적으로 생각했다면, 오늘이 이 남자의 마지막 날이었을 지도 모른다. 선원들의 날이 마지막이 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오늘은 차호원의 마지막이 아니었다.


“명아!”


벽에 기대 서있기만 한 주명의 시선을 눈치 챈 건지 호원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그 옆으로 다른 선원이 호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꺽꺽 웃어댄다. 호원이 따라 웃으며 소리쳤다.


“한참 재밌는데 거기서 뭐해! 빨리 와!”


“...”


재밌다라.

 

확실히 조금 전까지 울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호원은 즐거워 보였다. 속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주명을 반긴다. 도저히 몇 시간 전까지 살육을 무차별로 행하던 남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도저히 몇 십여 분 전까지 오열하고 있던 남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재밌다. 즐거운 시간.


가만히 서있는 주명을 대신해 신입 선원이 쪼르르 다가와 커다란 맥주 잔을 건넸다. 잔을 건네는 아이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이자 주명은 가만히 보던 것도 잠시 잔을 받아들였다. 잔 안에서 출렁이는 노랑빛 맥주가 꼭 노을에 진 파도처럼 흔들렸다.


주명은 맥주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입안으로 넘겨오는 차가운 쓴맛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테이블 너머 선원들과 깔깔 웃고 있는 호원을 보니 매섭던 붉은 눈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명아. 너무 일찍 바다에 갔어. 너무 일찍..’


자신의 키에 반도 되지 않던 작은 선원의 몸을 끌어안은 호원이 흐느끼며 말한다. 주명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칼을 고쳐 잡으며 그를 식은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은 아이의 몸을 끌어 안으며 호원이 울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타인의 피를 뒤집어 쓴 야수가 된 채로 어린 천사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을 붙잡은 호원의 손이 발발 떨리는 게 보인다. 마치 떨어지면 안 된다는 양 강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끅, 끕. 애탄 울음소리를 삼키며 주명은 눈을 감았다. 사람을 베며 웃고 있던 남자는 베어진 사람을 위해 울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일까.
주명이 눈을 깜빡였다. 피칠갑을 하고 있던 그의 선장은 이제 깨끗하고 하얀 옷을 입고, 맑디 맑은 하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과 섞여 있다. 주명은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네가


누군가의 기일이 ‘재밌다’ 라고 표현한다면


나 또한 그 ‘즐거움’ 에 섞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

 

 

"언젠가 향해가 끝날 날이 오겠지?"

 

일찍이 해가 뜰때 시작했던 전투가 마무리 되면, 산처럼 쌓인 시체를 태워 바다에 내보냈을 땐 해가 저물어 노을이 졌다. 잔치를 마무리 하고 나오면 해는 어느새 저물어 있었다.

 

호원은 배의 간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에 주명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꼬부랑 할아버지 될 때까지 계속 하려고?"

 

"뭐 어때. 아기 때부터 바다에 있었는데."

 

호원은 태어난 곳도 바다 위에서였다. 육지를 밟은 시간 보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배에 실은 날이 더 많았다. 그런 그가 바다에 나올 생각을 해보자니 딱히 조각이 맞추어 지지는 않았다. 

 

그는 바다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끝이 오겠지."

 

"에에~.."

 

"에에~.. 가 아니지. 늙어서까지 해적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언젠가 뒤를 물려줘야 하는 날이 올 걸. 주명이 덧붙여 말했다. 호원은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 본다. 까만 하늘 위로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호원은 손가락을 올려 별의 개수를 가늠해보다가 다시 팔을 내렸다. 

 

"아니. 아마 못하겠지." 언젠가 바다 위에 서지 못할 날이 온다. 매일 옆에 서있던 부하가 사라지고, 새로이 배에 침범한 적이 다시 바다에 내보내지는 것을 지켜보며 호원은 생각했다. 

 

바다는 넓지만 끝은 있다. 한계까 있다. 언젠가 끝이 난다. 언젠가. 호원이 고개를 내렸다. 그를 따라 주명도 아래로 시선을 내린다. 밤바다의 거친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배의 등판을 부딪쳐간다. 간판에 엉덩이를 붙인 채 호원이 다리를 흔들자 참다 못한 주명이 입을 열며 경고했다. "하지 마라. 떨어진다 너." 

 

"싫다. 끝나는 거."

 

호원이 고개를 뒤로 쭉 빼고선 주명을 보며 웃었다. 싫다는 것 치곤 활짝 웃는 얼굴에 주명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세웠다. 

 

"주명아."

 

"말해."

 

"언젠가 끝이 온다면, 그때도 옆에 있어줄 거야?"

 

"..."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 응? 있어줄래? 끝이 온다는 말은 바다를 내려와야 한다는 것, 호원에게 있어 죽음을 뜻하는 것일 텐데. 그는 참 욕심이 많았다.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는 거냐. 주명은 난간에 팔을 걸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가린 탓에 표정을 알 수가 없어 호원의 입이 오리발처럼 나왔다.

 

"뭐야. 싫어?"

 

"싫고 나발이고."

 

응? 하고 반응한 사이에 주명이 고개를 올렸다. 눈 꼬리가 환하게 휘어 올라간 모습을 보며 호원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어두운 밤하늘도 이렇게 밝게 빛이 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할 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싫다고 말하면 네가 응, 하고 대답할 거냐?"

 

호원이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아니.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어?

 

하여간. 고집불통 선장인 건 여전하지.       

 


 

 


'차호원 > 해적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의 침묵 (1~2)  (0) 2017.05.17
차호원/학원물 2018. 8. 24. 17:19

[루라님 생축♥] 첫만남

길 을 비 켜 라 

앤 오 님 이 

지 나 가 신 다

 

앤오님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 (머리 대굴빡)

제가 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학원물에서 주명이랑 호원이 첫만남을 쓰고 싶었어요...

예전에 앤오님이 그려주셨던,, 호원이의 불행 만화 한컷을 조금 참고했습니다.








오늘은 차호원의 불운이 더욱 눈부셨던 날.

눈을 떴을 때부터 카운트 다운은 시작된다. 막내 동생이 핸드폰에 장난이라도 친 모양이던지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그날은 호원이가 반 아침 당번이었다. 일어난 시간은 학교 등교 시간까지 약 15분이 남은 정각. 택시를 타고 가도 10분이상이 걸리는 거리라 시간을 확인한 호원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머리는 감을 새도 없이 붕 뜬 머리칼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세안하고 양치하는 데만 3분. 미리 다려 놓았던 교복을 허겁지겁 입는 데만 2분. 밥을 먹을 틈은 없으니 아랫 동생이 먹고 있던 토스트를 물어다 밖으로 뛰쳐나간다. 제 시간에 도착할 거란 희망은 버렸지만, 적어도 답이 없을 정도로 지각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호원은 자신의 불운을 간과했다. 

이 정도로 끝날 거란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물고 있던 토스트는 뛰어가다 갑자기 덮친 비둘기 떼한테 뺏겨버리고 만다. 아직 한 입밖에 못 먹었는데..! 바닥에 주워 먹은 게 상당한지 포동포동한 몸을 끌며 기어이 토스트를 뺏어든 비둘기 떼가 돼지 떼처럼 보였다. 덤벼들 용기는 없어 결국 슬금슬금 옆으로 빠져 학교로 향한다.

거기로 끝났으면 좋았을까.

바닥에 물을 뿌리려던 아주머니와 휘말려 물을 바가지로 뒤집어 씌어졌다. 

새와 인연이 끝났을까 싶었지만, 지나가던 비둘기의 똥이 머리에 직격해 버린다. 

자기 발에 헛디뎌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버스정류장 바닥에 얼굴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개똥을 밟았다.

가방 아래가 터져 책이랑 필기도구가 이리저리 흩어져 떨어졌다.

겨우 도착한 학교에 서둘러 교실까지 달려가려다 학주에게 들키고 만다. 무사히 지나갈 수 있던 것을 운동장 10바퀴를 돌았다. 

"..그래서 등교하자마자 이꼴이라고?"

기섭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호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나머지 친구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은 1교시가 다 끝나가서야 교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마저 점심시간까지의 남은 쉬는 시간 동안 종일 담임 선생님께 시달려 눈 한 번 제대로 감지 못했다. 

겨우 4교시 종이 치고 나서야 꼬질꼬질한 옷을 갈아 입을 수 있게 된 호원은 대충 화장실 세면대로 머리를 감고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으 냄새. 교복에 고인 지린내를 보며 친구들이 진저리를 쳤다. 호원의 얼굴이 울듯말듯 구겨졌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기구할까? 라고 쓰여 져 있다. 기섭은 혀를 차며 "별 수 없잖냐." 라 덧붙였다. 

호원의 불운을 아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꺼내는 대답이었다. 그게 네 운인걸 어쩌냐. 다음부터 조심해야지. 별 수 없잖아. 


억울하다. 억울한데, 인정해버리는 나도 싫다.. 

책상에 쿵, 쿵 이마를 박으며 호원이 한숨을 내쉰다. 젖은 머리칼은 말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 뚝 떨어지는 것을 본 기섭이 보다 못해 가지고 있던 담요를 던졌다. 
"이거 써."

"..수건 없어어?"

"불평이 많다?"

이거 초 학기 때부터 봤던 것 같은데... 길게 말을 늘어뜨리던 호원이 툴툴거리며 젖은 머리칼을 담요로 대충 털어냈다. 수돗물로 대충 씻어낸 게 전부였던 지라 찝찝하기까지 하다.


차호원이라고 하면 당연하게 불운이 따라가는 존재였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그의 친구들은 이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이 아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주 옛날부터 안 좋은 것들만 엉켰다. 부모님도 이가 걱정 돼 슬쩍 무당에 맡겨 보았지만 무당까지 '천성부터 이런 놈이다.' 라며 손을 내둘렀다고 한다. 

뭐에 씌였다거나, 어떤 벌을 받는다거나 같은 미신을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호원은 운이 극도로 좋지 않았다. 태어난 게 용하다고 불릴 정도로. 

하루라도 좋은 일이 일어날까 말까인 확률 속에서 살아가는 호원이었기에 새삼 이런 불운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괜찮다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도 힘든 건 힘들다구...'

죽겠네 정말. 팔에 고개를 묻으며 우울해하는 호원을 보고 친구들이 눈치를 보았다. 

쟤 진짜 우울해 하네. 근데 저게 어디 한두 번 일어난 일이람? 누가 좀 달래봐. 과자 가지고 있는 애들 있어? 나 있어, 소금사탕. 그딴걸 왜 가지고 있냐;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고가자 기섭이 박박 머리를 흐트렸다. 이러다 시간만 가지. 뭐라도 한 마디 던지려 기섭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여기 농구부원 있어~?!"

호원이 있는 반에 농구부원이라고는 단 한 명 뿐이다. 파묻고 있던 고개를 올려 목소리가 들렸던 교실 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남자아이가 농구공 두 개를 들고 서있었다.



농구공이 왜 가정실에 돌아다니던 건지 모르겠다. 굴러다니는 농구공을 발견한 선생님이 농구부원에게 가져다 달라고 건네면 얼굴 모를 학생이 호원에게로 다시 패스. 

귀찮은 것은 꼭 나한테 오지. 농구부 담당 선생님께 열쇠를 받고 다시 교실에 돌아오면 친구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호원이 부실에 공을 가져다 둘 동안 맛있는 거라도 사오겠다며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조차 친구들의 부재에 맥이 빠져버린다. 핸드폰을 도로 바지 주머니 안에 밀어 넣고 축 쳐진 어깨로 한아름 두 개의 공을 안았다. 

우울한 건 여전하지만, 과자로 참자. 친구들 또한 자신을 생각해서 한 행동들임을 알기에 호원은 내려가려던 입 꼬리를 올리며 겨우 미소를 지었다. 

바닥만 보고 있던 호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우울해 한다고 어디 불운이 가시겠나!

걱정해주는 친구들도 있고. 불운하다 해서 세상이 꺼지는 것도 아닌데다 이런 일이 처음 일어난 것도 아니다. 호원은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축 늘어뜨려 있던 어깨를 반듯이 세워 허리를 폈고, 풀려 있던 눈에 부릅 힘을 주었다. 괜찮아 차호원. 뭘 기가 죽고 그래. 힘 내! 부실로 가는 호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기운 내 차호원,

너에겐 보다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잖,


삐끗. 걸어가던 발 스탭이 엉켰다. 어라. 양 손에 끌어 안고 있던 농구공이 바닥을 직행한다. 어라. 어라라. 



쾅! 소리와 함께 얼굴이 대리석 바닥과 충돌했다. 통, 통, 통.. 농구공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가 먹먹하다. 이마가 아프다. 코 깨진 건 아니겠지.. 호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바닥 위에서 신음했다. 

아프다. 아프다.. 얼얼한 코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론 주먹을 세게 쥐었다. 맨바닥에 정면으로 부딪친 터라 눈앞이 새하얗고 얼얼했다. 

"아야야...."

호원은 급하게 코 밑을 훑었다. 다행히 뜨거운 뭔가가 흐르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프긴 하지만... 천천히 바닥에 발을 짚고 일어 서려던 호원은 그만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이고, 창피해라. 이번엔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거냐고. 아픈 것도 한편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속상했다. 마음을 먹은 것을 뒤로하고 또 이렇게 실수하고 만다. 

운이 없네 정말. ..아니, 핑계 대지 말자.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덜렁거리는 거잖아. 결국 불운을 불러들이는 이유 또한 나라는 것을.

아파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던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 호원이 다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혼자서 제 발 걸려 넘어지는 애는 또 처음 봤네."

호원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민 한 소년이 있었다. 까만 곱슬머리를 한 그는 한 손에는 커다란 도자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곤 있었으나 불쾌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신기한 듯 호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을 내미더니 이내 입 꼬리만 올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냐?" 불현 듯 호원의 눈에 비친 것은 소년의 호기심 가득한 붉은 눈이었다.


그날은 호원의 불운이 더욱 눈부셨던 날이다.

허나 가는 것이 있다면 돌아오는 게 있듯, 그 만남이 돌아오는 첫 행운이었다는 건 호원도 소년도 모를 이야기었다. 

그저 먼 이야기.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앞으로 오분 뒤, 호원의 불운력이 상승하여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주명이라 불리는 소년의 도자기를 깨트리게 된다는 것 정도밖에는. 물론 이 또한, 두 사람이 알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인연이었으니까. 


                    




'차호원 > 학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0) 2017.11.29
발렌타인데이  (0) 2017.05.17
엉엉 ㅠㅠ  (0) 2017.05.17
  (0) 2017.05.17
차호원/여러 AU 2017. 6. 4. 01:29

비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기반 AU...
*히로아카 세계관 바탕은 일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한국 초능력 히어로 전문 양성 고등학교가 별도로 있다고 하자...




1.


“-아, 나 꼭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가 될 거야!”


 소년은, 히어로를 동경하고 있었다.



2.


 호원이 일반과에서 히어로과로 편입된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새롭게 편입됐더라도 1학년으로서 약 두 달 남짓 정도 지났을 때였고 같은 A반 학우들과 쉽게 어우러지는 건 소년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망 받는 히어로과 학생들인데, 초학기 때부터 이 얼굴들을 잊을 수가 있을쏘냐.
 모든 걸 무중력 상태로 띄워버리는 능력, 현대 사회에서 선망 받는 전기 계열의 발열 능력,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몸을 이루어내는 능력, 로켓처럼 빠르게 쏘아 올리는 다리를 가진 능력까지 아주 다양하게. 이런 천재적인 능력을 부여 받은 자들과 함께 같은 반 같은 책상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다니 호원에게 있어 평생 없을 행운과 다름없었다.

 열심히 해야지! 히어로 양성 교육 학교에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아온 일반과에서 꾸역꾸역 클래스메이트들을 차고 올라와 얻은 자리가 아닌가. 첫 입학시험 때는 자신의 초능력 계열과는 맞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눈에 띄지 못해 떨어져 버렸다. 겨우 턱걸이로 일반과에 입적한 것도 기적 중에 기적. 정말 다행히 히어로과에 새롭게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코리안 유에이 고교 체육 대회’의 실적 덕분에 얻을 수 있었고, 호원은 다시 새롭게 이 학교의 히어로과 학생으로서 당당하게 등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호원의 눈에는 의자가 담긴 투혼의 불꽃이 마구마구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여전히 몸과 운이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히어로과에 들어와 줄곧 꿈꿔왔던 ‘야망’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큼은 자신의 불운도 허락해 줄 것이다. 차게 식어가는 손에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며 호원은 눈을 감았다. 그래, 조금 정도는 기뻐해도 되겠지.



3.


 지만, 혼자서 감수성에 푹 빠져 기뻐할 틈은 없는 것 같다.


 “변태같이 혼자서 뭘 그리 실실대며 서 있냐.”
 “~엇?!”


 
 4.


 예상외의 목소리에 놀란 호원이 몸을 흠칫 떨며 빠르게 고개를 올렸다. 채 닫히지 않은 교실 문 너머로 흑발의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소년이 미간을 찌푸린 채 호원을 노려다보고 있었다.
 아, 문은 닫아놓을 걸! 랄까, 쪽팔려!!! 교실 안에 홀로 덩그러니 서선 히죽대며 웃는 남고생의 모습은 확실히 그 말대로 변태 같았을 것이다. “그, 저기 오해..!” 그제야 부랴부랴 허둥대보지만 운은 소년의 편이 아니다. 허둥대다 못해 발이 책상 발거리 틈에 걸려 그대로 바닥에 수직낙하. 억! 소리와 함께 엎어진 호원을 내려다보며 같은 코리안 유에이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원 참... 띨띨하게 뭐하는 거야. 괜찮냐?”


 일어나. 무심하게 툭 던진 말과는 다르게 호원의 코앞에 소년의 손이 다가왔다.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그의 손을 잡아 호원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혼자 꼬여서 엎어지지 좀 마, 편입생. 전부터 봤는데..... 너 주변에서 호구라는 소리 많이 듣지?”
 “......(맞는 소리라 부정 못함)”
 “듣는구만.”


 윽.. 작게 앓으며 대충 머리를 흩트리던 호원은 그제야 겨우 자신을 일으켜주던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호원과 같은 1-A반의 히어로과 학생이다. 편입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 둘이서 마주해 말을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 그가 낯설게 ‘편입생’라고 부르는 것도 호원과 소년의 거리를 설명해주는 호칭이었다.
 호원과 같지만 조금 더 짙은 색을 띄고 있는 청결한 흑발의 머리카락은 살짝 곱슬기를 머금고 있다. 옛날부터 다친 모양인지 왼쪽 눈을 하얀 안대로 가리고 있지만 반대쪽인 오른쪽 눈은 태양처럼 적색으로 타오르고 있다. 호원보다 조금 신체가 큰 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의기소침 해질 정도로 상당하게 얼굴이 깔끔한 미남. 늘 어딘가 화나 보이긴 하지만.... 하지만 단지 체격과 외모만 뛰어난 게 아니다.
 
 ‘코리안 유에이 고교. 히어로 인재 창출 역사 이래로 다음 세대를 잇을 TOP3의 유망주...’


 주명. 그의 이야기는 뉴스, 예능, 신문기사, 소문 등 들어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히어로 양성 전문 고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빌런들을 손쉽게 때려잡는 유망주 히어로로 유명했다. 사이코키네시스의 능력으로 이제껏 헤어 나오지 못한 빌런들은 없다. 그는 무려 고교의 추천입학으로 온 우등생. 호원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남자. 이런 남자랑 같은 교실에 같은 책상 의자를 쓰고 같은 수업을 듣...


 “뭘 또 멍청하게 멍 때리고 있어.”

 “?! 아야!”


 저기 아픈데요?! 첫 얘기를 나누나 싶었더니 망설임 없이 호원에게 딱밤을 때리는 이 남자는 무엇인가!! 이 정도로 뭐가 아프냐. 쯧쯧 혀를 차던 주명이 호원을 때린 손가락을 튕기는 시늉을 하면서 웃었다. 들어 올린 팔. 호원은 그제야 남자의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 잠깐, 주명 너- 팔!”
 “...멋대로 잡아 흔들지 마. 따갑거든?”
 “아니.. 출혈이 이렇게나 심한데 단순히 따가운 걸로 안 끝나!”


 일반인이면 과다출혈이거든요! 호원이 덥석 잡은 주명의 팔은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칼로 쑤셔 그은 듯한 상처가 움푹 패여 있었다. 뼈가 드러나지 않는 게 신기 할 정도야. 어떻게 출혈을 막고 온 모양인진 몰라도 다행히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심한 고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UJK 훈련실에서 새로운 특제 거대 로봇이 만들어 졌다고 들어서 시험 삼아.”

 “으아아.. 제대로 출시되지 않은 걸 멋대로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조금 불량이긴 하더라. 죄다 고철덩이로 만들었으니 알아서 고쳐주겠지.”
 “....”


 분명 입학시험 때도 거대 로봇들이 학생들을 상대했었지. 로봇 하나만으로 열댓 명의 아이들이 허둥지둥 거렸었는데 그걸 혼자서, 특히나 제대로 출시가 안 된 물건을 홀로 다루다니 역시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어쨌든 꽤 중상이야... 얼른 보건실에 가보는 게 나아. 아니면...”
 “허, 너도 참 별 걸 다 걱정한다 편입생. 이런 건 대충 침만 바르면...”


 낫는다고. 주명의 말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따뜻한 기운이 주명의 부상당한 팔을 감쌌다. 퐁, 퐁 부드러운 솜털과 맑은 빛이 호원의 손바닥 주위로 튀어 나와 상처를 감싸고 곧 주명의 통증을 줄여주기 시작했다. 이는 엄밀히 ‘치료’ 계열의 능력이다. 범죄 투성이의 곳으로 둘러싼 이 세계에서 치료 계열의 능력은 특별하다.


 “편입생 너... 힐러였나?”
 “아까부터 편입생 편입생 하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호원은 눈 꼬리를 살짝 휘어 올리며 주명을 향해 다시 미소 지었다. 이젠 편입생이 아니라고.


 “차호원. 호원이라고 해.”


 일단 같은 클래스메이트인데 기억해주지 않을래? 주명아.


5.

 “아, 참고로 내가 겨우 히어로과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니까!”

 차호원
 나이 17세
 키 167cm
 몸무게 평균 57 , 측 정 불 가
 파워 D 스피드 C  테크닉 B 지력 C 협조성 A
 가족 사항 부 , 모 , 형제 둘
 능력 자신의 지방과 근육을 깎아 손바닥에 에너지원으로 모아 상처에 집중시켜 재생시킨다. 정확힌 치료가 아니라 재생. 지방과 근육을 깎아 치료하기 때문에 내장이 파열될 정도인 상대를 재생시키면 한 번에 3~4kg가 빠져 몸에 무리가 올 때도 있으나 평소에 에너지원 섭취를 남들보다 두세배로 보존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큰 무리는 없어 보임.
 일반과에서 평균 이상 성적을 냈으나 입학시험에선 포인트 0P. 체육 대회 실적 때 4회전까지 진행. 회의 결과로 히어로과에 편입 결정.

 “너... 운도 없는 호구 주제에 잘도 들어왔구나.”
 “...심한 거 아냐!?”


6.

 쾅! 소리를 내며 벌컥 교실 문이 열리고 너머로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차호원이 헐레벌떡 뛰쳐 들어온다.

 “명아! 축하해!”
 
 그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늘 하이텐션이기는 하다만.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활짝 웃어대는 한심한 얼굴에 창가를 내다보던 주명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주명은 그가 기뻐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귀찮아지는 일을 맡은 것뿐인데 그게 축하할 일이냐?”
 “축하할 일이지 그럼!”

 후다닥 달려온 호원이 냉큼 주명이 앉은 마주 편 의자에 몸을 던져 앉는다. 이미 달려오던 중 몇 번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부분부분 상처가 난 뺨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유능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쓰려고 하질 않는다.
 주명이 자신의 걱정을 하는 걸 알기나 하는 건지 정작 둔해 빠진 호구원은 두 눈을 반짝이며 냉큼 어제 발간된 히어로 잡지를 내밀었다. 이미 주명이 몇 번이나 본 매거진이었다. 그곳엔 메인으로 주명의 이야기가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이제 겨우 2학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임시 면허를 벗어나 정식 면허증이라니! 히어로 고교 이래로 최초일 거야!”
 “허풍이거든. 일본의 유에이 고교에서도 이미 한 학년의 반절 이상은 정식 히어로 면허증을 취득했다고 난리잖냐.”
 “아, 어... 그럼 한국 최초로 하지 뭐!”

 어쨌든 대단하잖아!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기뻐하는 호원의 모습에 주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임시 면허는 1학년 시험 이래로 한정적으로 히어로과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권한으로 배속된 히어로들과 동참해 빌런들을 향해 전투 개성을 쓸 수 있는 권한이었지만 정식 히어로 면허증은 조금 다르다. 옆에 굳이 배속된 다른 히어로가 있지 않아도 자신의 판단 이래로 전투 개성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물론 그만큼 세간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있었지만 유에이 고교 히어로과 아이들이라면 꼭 가지고 싶어 하는 권한 중의 권한. 3학년도 취득하기 힘든 졸업시험과 마찬가지인 이 면허증을 최초로 주명이 먼저 따온 것이다.

 “이제 매스콤이나 기업들도 주명을 스카우트 하려고 끙끙 앓겠네! 저기- 명아, 어디로 갈 거야?”
 “아직 깊게 생각 안 했어. 저번에 동참했던 히어로 선배가 조언해 준 몇 개 정도 생각하고 있긴 해.”
 “주명은 어디에 가서도 잘 할 거야! 헤헤, 뭔가 분하기도 한 걸~ 그치만 기뻐. 어떡하지? 진짜 축하해!”

 나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양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한 얼굴로 호원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참 그답게 바보 같은 모습이라 주명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팔을 흔드는 소년의 손목에 파란 비즈 팔찌가 흔들렸다.
 
 “암,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내가 도와준 몫은 똑똑히 치러서 너도 면허증 꼭 따라.”
 “응! 나 힘낼게 명아. 나는 네 운을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분명 앞으로의 일도 잘 풀리겠지. 부드럽게 입가를 올려 웃던 호원이 주명이 시선을 던졌던 팔찌를 매만지며 말했다.
 유난히 운이 없어 의기소침해 있던 그에게 주명이 덥석 만들어다 준 팔찌였다. 그는 히어로 실력과 지력 외에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이게 네 불운을 막는 액받이가 되어줄 지도 모르지. 함부로 쓰면 죽을 줄 알아. 테스트에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아 소침해 있던 호원은 그에게 팔찌를 받고선 엉엉 울었다.
 팔찌가 운을 불러다 준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호원은 불운을 띄는 남자며 행운의 팔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같은 시험을 본 결과로 주명만 덥석 합격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받은 계기는 상당히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던 모양인지 호원은 전처럼 불운으로 심하게 우울해하지 않았다. 주명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 왔는 걸. 그는 전보다 더 상큼한 얼굴로 웃으며 주명 옆에 서 있었다.

 “2회전에 아깝게 떨어졌지만...
 “열심히 해라. 응원 정도는 해줄 테니.”
 “...응, 고마워 명아. 그러고보니 혼자 멋대로 떠들어선 축하도 제대로 못 해줬네.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10000원 이내로 뭐든 사줄게! 라고 말하는 얍삽한 차호원을 보며 주명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고 싶냐? 그게 뭐든이라고?

 “오늘은 라라코O트 각이다. 한 턱 쏴. 고기라도 썰게.”
 “-뭐?! 양도 적으면서 비싸기만 하잖아!”
 “뭐든이라며?”
 “만원 내외 한정이라니까!”


7.

 “명아 넌 가끔 오로라 같아.”
 “뭐?”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가끔 손을 뻗으면 점점 더 멀어져서.”



 마치 환상 같아. 침대에 누운 채 푹 가라앉은 잔잔한 목소리로 웅얼대는 호원에 주명이 잠시 흠칫, 몸을 떨었다. 호구같은 게 참 별난 비유를 하네.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주명이 호원이 누워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작은 침대가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편안한 듯 두 눈을 감으며 웃고 있던 호원이 주명이 다가오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올렸다. 거리가 가까워.

 “그치만 가끔 그렇게 느끼는 걸. 개성도 그렇고, 평소에도 그렇고.”
 “..너... 내가 졸업 연수 간다고 해서 아직도 삐져 있는 거지?”
 “...그런 거 아냐.”
 “맞구만 뭘. 표정에 다 드러나선.”

 멍청한 게 감출 줄을 몰라요. 주명이 작게 키득대며 호원의 뺨을 꼬집든 주물럭댔다.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호원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연수 가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보기도 힘들잖아. 우리 졸업 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유에이 쪽에서 강제로 정해진 일이니 별 수 없잖아. 게다가 가라고 밀은 건 차호원 너거든?”
 “그야... 뭐처럼의 기회니까 유망한 히어로가 될 주명이라면 놓칠 수 없는 걸.”

 그치만 간다고 하니까 역시 조금 서운하긴 해. 툴툴대던 호원이 주명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거부감 없이 당기는 대로 다가온 주명의 입술에 간지럽히듯 호원의 입술이 부벼졌다. 쪽. 애타지만 절제하는 것 마냥 우물대던 입술이 서로를 쪼아 먹는다. 주명이 호원의 귓가를 매만지는 사이 호원이 그의 교복 넥타이 끈을 풀어헤쳤다.
 자주 연락 할게. 달래듯 주명의 더운 목소리가 호원의 눈가에 닿았다. 호원은 대답 없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는 그의 안대를 잡아 벗긴다. 역시나 거부감 없이 툭 떨어진 안대 너머로 흉터가 짙게 남은 눈가를 호원이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이미 시간이 지난 흉터는 재생 개성을 가진 호원이라도 고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릇처럼 주명의 눈가를 매만지고는 했다.

 “명아, 너는 왜”
 “응?”
 “왜 히어로가 되고 싶은 거야?”

 셔츠 단추를 풀면 하얀 나체가 드러난다. 익숙한 듯 서로의 살결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다. ...아. 떨린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한테 있어서 남은 길은 이것뿐이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으니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쓰잘 곳 없는 질문이라며 주명이 불평했다. 셔츠 한 장이 침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두 소년은 커다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니 전력을 다 할 뿐이야. 몇 번이나 호원에게 대답했던 말이다. “....그렇구나.” 호원도 매번 같은 대답을 던지며 까만 흑안의 눈을 깜빡였다.

 “명아.”
 “이번엔 또 왜.”
 “...응원할게.”

 나,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는 없으니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끌어당긴 호원의 얼굴은 어딘가 온화해 보였다. 나는 전력으로 네 히어로 길을 응원 할 거야. 계속. 마치 주문이라도 거는 듯한 잔잔한 목소리에 주명은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잠이 몰려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실컷 응원이나 해 둬. 마지막 말을 건네는 대신 호원의 입가에 제 입술을 묻으며 주명은 눈을 감았다.


8.

 “명아, 너는 꼭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가 될 거야!”

 호원은, 마치 히어로를 동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9.

 응원할게 명아.
 라며, 그렇게 달콤한 음색으로 말하던 건 너면서.

 “..왜 그곳에 있어?”

 주변은 온통 파괴되는 폭발음과 사람들의 비명소리밖에 울리지 않는다. 히어로들은 주명을 붙잡고 빨리 인명구조와 빌런 퇴치를 명령하고 있었지만 주명은 마치 온 몸이 꽁꽁 묶인 것 마냥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지 못했다. 쳐들어 온 빌런들의 모습을 떡하니 보면서도 멍청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치 머리로 주명의 머리를 후려친 것 같았다.

 도시 건물은 이미 빌런에 의해 몇 채나 붕괴되고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빌런들의 습격에 현직 히어로와 이미 발을 뗀 은퇴한 히어로들도 참가했으며, 유에이 고교의 히어로과 학생들에게도 전투 개성이 허가된 뒤였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이 도시 속에서 마네킹마냥 서 있는 자는 오직 주명 뿐이었다.

 마치 결속이라도 맺은 것 마냥 검은 양복에 붉은 양귀비꽃을 왼쪽 가슴 부위에 부착한 정장을 입은 빌런 연합들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히어로들이 싸우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놀이터라도 보는 꼴 마냥 말이다. 평소라면 소름끼치는 그들의 행위에 치를 떠는 주명이 먼저 달려들어 그들을 제압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힌 그들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그’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응원한다며, 오늘도 힘내라며, 먼 곳에서도 연락을 꼬박 꼬박 해주던 그 사람을. 언제부턴가 연락두절이 돼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겨우 귀국 명령이 떨어져 한국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빌런들의 전쟁선포에 찾으러 가지 못했던 그를. 쭉 함께했고 쭉 사랑했던 그 남자를. 히어로를 동경하던 그 소년을. 차호원을.

 “안녕 명아. 오랜만이야. 건강하게 잘 지냈어?”

 오직 살육만으로 가득한 현장을 즐겁게 내려다보는 빌런 연합들의 한 패거리에 섞여있는 차호원을 보며, 주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0.

 “아아~? 그치만 명아 네 능력, 이미 알고 있었는 걸. 상처 받았단 얼굴 하지 마. 너도 숨기고 있었잖아? 사이코키네시스가 아니라 일루전이지. 모든 빌런들을 세뇌적 행위 능력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저주받은 능력. 아- 많이 놀랐나봐? 어디에 놀랐어? 네 능력을 모두 알고 있단 점? 내가 히어로가 아니었단 점? 그치만 명아 네가 먼저 얘기하지 않으니 나도 얘기하지 않았던 것뿐이야. 거짓말은 한 적 없는 걸.”

 난 애초에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말 따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매혹스럽게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 호원의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을 치료하던 소년의 깨끗한 손에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물론, 그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가만히 주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호원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얼굴도 잘생겼어. 역시 명아야! 순진무구한 표정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아, 설마 내가 지금도 재생 치유적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정말? 명아 넌 유에이 최고 수석이잖아. 이 정도는 금방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애들의 상처나 손상된 부위는 잘만 재생시켜 놓구선 정작 내 몸을 치료하지 못하는 걸 보면 뻔하게 드러나잖아.”

 그래, 알고 있었어.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지.

 “이거 꽤 쓸만하면서도 은근히 불필요했단 말이지.. 덕분에 학교에서 좋은 성적도 못 내고. 서포트과나 가라면서 얼마나 놀림 받았던지... 말하는 내내 죽여버리고 싶었다니까. 아, 물론 주명 넌 아냐! 다른 나쁜 히어로 애들 말야.”

 서슴없이 죽여버리고 싶다. 라는 말을 내뱉는 호원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차호원이 아니었다.

 “누나께서 불필요한 걸 주셨어... 역시 히어로들에게 미움받고 있기는 한 가봐. 뺏는 순간 내내 미움 받았거든. 능력을 받아도 능력은 날 싫어하고 있던 거겠지. 저주 받은 거야. 떠나던 내내 누나가 말했어. 절대 용서받지 못하면서 죽어갈 거라고. 으헤헤... 뭐어, 불운이 가득한 내가 저주받으며 죽어갈 건 뻔한 이야기긴 하지만!

 하지만 이젠 별로 상관없어. 왼손을 살짝 쥐었다 풀며 호원이 작게 웅얼댔다. 이미 검붉게 달라붙는 피를 대충 벅벅 닦아내던 사이 호원의 하얀 뺨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호원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11.

 “다른 사람의 능력을 가져가면 되는 걸.”

 그래, 예를 들면 주명 네 것처럼. 

 “드디어 지긋지긋한 저주가 풀렸어. 이제 개성을 참을 필요는 없으니까.”


12.

 “차호원.. 네가 왜...”
”기억 나? 네가 떠나기 전에 네 길을 응원하겠다고 한 점.“

 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다고. 주명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호원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너덜너덜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히죽대며 주명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변함없이 응원하고 있어.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가 된다는 너를. 나는 할 수 없으니까.”
 “...이런 의미로.. 한 말이었냐....”
 “글쎄?”

 키득키득 웃으며 호원은 손끝으로 가느다란 칼을 소환해냈다. 마지막으로 이 남자가 터치 한 히어로의 능력은 히어로의 무기고에 있는 수많은 무기를 소환시키는 능력. 주명과 함께 한 시간이 많은 덕이었을까, 상상 이래로 주명의 개성 특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칫, 주명이 혀를 차며 뒷걸음질을 했다. 심지어 호원은 ‘주명의 능력’까지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도리어 당한다는 건 복잡하고 끔찍한 일이다.

 “놀라지 마. 이것도 전부 명아의 사랑 덕분에 얻을 수 있었는 걸. 몇 년이나 쓴 재생 능력도 버렸는데 네 건 버릴 수가 없더라.”
 “...”
 “저기, 그렇게 싫은 얼굴이면 죽여도 괜찮아 명아.”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잖아. 싱긋 웃는 호원에게서 날카로운 쇠붙이가 날아왔다. 여유롭게 피한 주명에게 다시 한 번 몸을 날려 결국 칼과 칼이 맞댄 상황에 다다른다. 호원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와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다. 크읏.. 인상을 찌푸리며 초조해하는 주명과는 달리 여유롭게 웃기까지 한 호원은 얼굴을 내밀어 너덜거리는 주명의 칼에 입을 맞췄다. 쪽. 마치 침대 위에 입을 맞추던 그때 그 상황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소년의 모습은 정말로....

 “죽일 수 있다면 죽여 히어로. 그게 네 본분이잖아?”

 나는 빌런, 너는 히어로. 누구 하나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 가늘게 눈을 뜬 채 웃어보이던 호원은 다시 방긋방긋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호원은 동시에 칼날을 비틀어 자기 자신의 손목을 베어냈다. 베어낸 손목 끝은 그어진 칼날의 속살에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동시에 주명이 그에게 선물한 팔찌가 툭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어여쁜 파란색 구슬비즈가 공중에 흩어져 주명의 마음처럼 후두둑 떨어져 바스라진다.

 “아니면 그 귀한 능력 다 내게 주고 죽어주는 것도 좋아. 히어로!
 “...차...호원....너..!!!!!”


13.

 히어로를 동경한다던 소년은 
 이미 살육에 미친 살인광이다.


 14.

차호원
 나이 19세
 키 178cm
 몸무게 평균 65
 파워 B 스피드 S  테크닉 B 지력 B+ 협조성 A+
 가족 사항 없음.
 부 , 모, 형제 둘 10년 전 ‘히어로 대 빌런 4차 대전에서 살해당하고, 홀로 생존. 이후 보육원에서 자랐으나 그 뒤로 행방이 묘연.
 능력 초능력을 카피하는 능력. 최대 2~3개의 능력을 카피할 수 있으나 시간제한이 있다. 상대의 피부에 닿으면 능력을 카피할 수 있지만 읽어낼 순 없다. 본인이 얼마나 활용하나에 따라 위력도가 달라진다. 피부에 닿는 정도가 깊어질수록 능력을 오래 사용할 수 있지만 단, 능력을 가진 자의 목숨을 뺏을 경우 그 능력 자체를 ‘뺏어오는 것’이 가능. 다만 살육으로 인해 뺏은 능력을 쓰면 쓸수록 생명력이 깎이므로 사람을 죽여 능력을 얻으면 그 능력은 금방 해지하는 편이다.
 암묵상으론 보육원에 있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 빌런 빈민가에 팔려 빌런 연합 상부층으로 끌려가 훈련받는다. 중학생 이후 도시에 섞여 학생 행위를 하다 작전 수행을 위해 한국 유에이 히어로 인재 양성 고등학교에 일반과로 진학.
 그 시기에 00기업의 힐러 히어로가 행방불명된다.
 주명과 만나다. 






차호원 완전 쓰레기 아냐..? (진짜 막말)

히로아카 보다가 뽕차서 주명이로 보고싶다! 해서 썼더니 너무..막장이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먼가 더 복잡하게 이어나가고 싶은데 무리였습니다..

호원은 사실 히어로를 극도로 혐오해요... 가족이 죽었을 때 히어로가 온다고 구출을 기다렸지만 가장 외각 쪽에 있던 터라 무너져가는 집에 깔려서 가족이 죽어가는 걸 다 지켜봤거든요,,,, 빌런 빈민가에 팔려나가긴 했지만 어찌저찌 능력이 잘 보여서 상부층으로 불려나간 건 어찌 보면 호원에게 있어서 복수? 행위를 할 수 있어서 좋았을지도 모르고..

그치만 주명을 만난 뒤로 그 결심이 조금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주명이 해외 히어로 연수를 가고 일을 그만둔다고 했으나 빌런측에서 일종의 세뇌 행위를 시켜서 얘가 더 맛간 겁니다(..) 뭐 그래도 사실 본심도 있어요 주명을 죽이고 싶단 건 아니지만 저렇게 살육전에서 히어로들을 죽이는 게 호원의 복수전이었지만.. 주명과 싸우고 싶지 않아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터트린 시점도 연수를 간 뒤였지만 주명이 돌아와버렸다.. 라는 이야기?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빌런측에서 세뇌+고문측이 나와있어서 사실상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는 것도 아닙니다 말그대로 저거 진짜 미친놈이에요 (..)

오랜만에 쓰니까 성격조정이 제대로 안 잡힌 걸수도..ㅠㅠ 흑흑 죄송합니다 사랑해용..


공미포 9,131자



 



 









'차호원 > 여러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누야샤 AU  (0) 2017.11.21
신과 나 (미완)  (0) 2017.11.18
> 熱  (0) 2017.05.17
센티넬버스 1  (0) 2017.05.17
호구원이와트 (1~4)  (0) 2017.05.17
차호원/아심여칭 2017. 5. 17. 22:59

사랑을 할게

2017.04.17




'차호원 > 아심여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과 요괴 사이  (0) 2017.05.17
효능이 없어 효능이  (0) 2017.05.17
변화 1,2  (0) 2017.05.17
가람&하즈키 로그 정리  (0) 2017.05.17
쿠키 로그 정리  (0) 2017.05.17
차호원/여러 AU 2017. 5. 17. 22:58

> 熱

*마피아AU

2017.03.26



 그들이 거래처 방에 도착했을 땐 썰렁하게 빈 내부 안엔 본 적 없는 값비싸 보이는 초콜릿이 테이블 위에 덜렁 올려 져 있었다. 호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주명은 내부를 힐끗 둘러보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안 왔어? 상대가 도착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낀 모양이었다. 응, 먼저 온다고 들었는데... 그의 물음에 대답하며 호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방과는 호원이 친숙감을 느끼지 못한 곳 중 하나였다. 어릴 적 유일하게 들어가지 못한 방이었기도 했고, 머릿속으론 어른들만 들어갈 수 있으며 자신이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차기 시작할 땐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들어간 기억이 남았다. 노인의 취향이 박혀 있는 고급 목재들과 어둑어둑한 인테리어는 무거운 분위기를 형성해 꺼림칙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앞으로 네가 혼자 이끌어야 할 것들이 많으니 잘 기억해두거라. 라고 말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고 기억났다. 그래, 이곳은 거래용 방으로 암묵적 뒷거래를 실시할 때 높은 자들이 앉아 협상을 나누는 할아버지의 방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이어 받은 자신의 것이 되었지만. 일을 이어받은 후 매번 거래를 협상하거나 손님이 올 때마다 이곳을 모셔오고는 했지만 올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음,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 할까... 반짝반짝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털썩 소파에 눌러 앉은 호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 진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아니, 먼저 만나자고 해서 왔는데... 이 영감은 어디로 뒷구멍을 뺐어?” 사람 일 다 빼고 왔더니만... 주명은 깔끔하게 넘겨 올린 머리카락부터 이마를 쓸어 올리며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호원과 주명은 일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드문 연락처로 호원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기 전 깊은 인연을 쌓던 암거래처의 우두머리인 어르신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인데다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호원의 본가에서 기다린다고 그는 말했다. 먼저 기다린다고 한데다 천천히 오라고는 했지만 어르신을 홀로 기다리게 할 순 없기에 호원과 주명은 부랴부랴 짐을 싸고 본가로 달려왔다. 그리고 도착.. 했지만 정작 반기는 건 싸늘한 방과 덜렁 초콜릿 한 개 뿐이니 주명이 답답할 만도 했다.


 “영감 어디로 내뺐어? 아직 도착도 안 했대?”


 주명은 슥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문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다물고 있던 입술을 가볍게 떼어냈다.


 “도착하신지는 오래 되셨습니다. 다만 중간에 연락이 와 잠시 처리하고 오시겠다며 먼저 도착하신다면 보스에게 조금 기다려달라고 하시더군요.”
 “하.. 그럼 그렇다고 말하던가. 괜히 일찍 왔네..... 시간은?”
 “보스와 주명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약 40분 정도 지났습니다.”


 그 전까지 초콜릿을 전해달라고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났다면 곧 온다는 이야기였다. 것보다 웬 초콜렛? 주명은 답답한 단추자락 하나를 풀고선 머리를 탈탈 털어냈다.
 
 호원은 오랜만에 그와 만난다며 붕 떠있었다. 듣자하니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점에 넘어가면 큰 일인데 저거. 몇 번을 말해도 붕방붕방대기만 하니 주명은 답답할 노릇이었다. 혈육이래도 서로 뒤통수를 치기 마련인데 호원은 자기 선 안에만 들어온다면 간이든 쓸개든 가볍게 내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쯧, 혀를 찬 주명은 호원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돌렸다. 미리 만남을 가지기 전에 관계자로서 우선 가볍게 경고는 넣어줘야 할 듯 싶었다.


 “야 차호원.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해도 방심하지 말고 요긴하게 이야기....”
 “??”


 예쁘게 포장되어 있던 초콜릿 포장지는 호원에 의해 뜯어져 있었고, 열린 뚜껑 안엔 이미 두어 개의 초콜릿 공간이 비어 있었다. 우물우물. 두 눈을 반짝이며 우걱우걱 초콜릿을 씹어 먹는 꼴이 제법 만족스러운 것 같다. ....후. 주명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쉰 후 성큼성큼 호원에게 다가갔다. 그 뒤를 지켜보던 조직원 남자는 저질렀다... 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둘을 응시했다.


 “말, 할- 틈은. 주.라.고!!!”
 “-!? 아, 아파!!!”


 뻐억! 큰 소리가 호원의 뒤통수에 울렸다. 호원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얻어맞은 부위를 꾹 눌러 감싼 채 원망스럽다는 듯 씩씩대는 주명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이야-!”
 “내가 할 소리다! 뭘 또 처 먹고 앉아있냐 넌!”
 “뭐- 냐니, 초콜릿....”
 “독이나 마약이라도 들어있으면 어쩌려고! 뒤지고 싶냐?!”


 이런 직종에서 일하는 놈이, 그것도 보스란 작자가 위험이란 걸 생각 자체를 안 해요! 이 빙구! 쏟아지는 팩트 세례에 호원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생각은 할 수 있거든! 그리고 괜찮아! 호원의 귓주변이 시뻘개졌다.


 “준 사람은 독 같은 걸 넣어줄 사람이 아닌 걸! 내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아무튼, 괜찮아! 봐! 아무 반응도 없는 걸!”
 “뭐든 그렇게 믿어버리니까 통수 칠 틈이 없는 거 아냐....! 하, 됐어. 이거 압수.”
 “아! 뭐야 치사하게!! 아직 한 입밖에 못 먹었는데!!!”
 “이 와중에 더 먹을 생각이었냐?!”


 어! 뻔뻔스럽게 양 고개를 끄덕이는 호원의 입가에 더덕더덕 초콜릿 가루가 묻어 나있다. 빨리 줘! 팔을 뻗으며 동시에 입을 벌리는데 혀에 초콜릿 무스 흔적이 남아있다. 아주 맛깔나게 먹었다 이거냐! 주명이 호원의 한쪽 뺨을 잡아다 쭉쭉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아아- 아파, 아프다고 바보!! 아프라고 꼬집지! 투닥대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조직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 둘에겐 상사와 부하라는 경계선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주명이란 자가 들어오는 조건부터 그 경계를 허무는 게 전제였으며 보스인 호원도 가장 먼저 선호하는 주제였던 듯 싶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인들이 쩔쩔맬 정도로 투닥여도 둘에겐 칼질도 총질도 그 무엇도 없다. 주먹질을 죽이려듯 하지도 않는다. 마냥 고등학생 친구처럼 투닥대는 꼴은, 머리끝까지 잠겨버린 이 세계와의 이질적인 것이었다.


 투닥거림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상황을 가려서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지. 큼큼, 조직원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꾹 다물던 입을 열었다.


 “저어, 보스.. 주명님. 손님께서 이미, 크흠. 막 도착하셨습니다만.”
 “!”
 “!”
 “허허.”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이지 안 그러나. 어느새 조직원 남자의 옆에 서선 남자들의 호위를 받고 들어온 노인은 보스와 그의 오른팔이 투닥대는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갑과 을의 위치라고 보기엔 그저 어린 청년들이 마냥 귀여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제 서야 어르신이 나타난 걸 보며 호원과 주명의 몸이 그 자세로 딱딱하게 굳었다.


 “죄- 죄송해요!”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호원이 손바닥으로 쭈욱 주명의 뺨을 꾹꾹 눌러 밀어내며 소리를 높였다. 뭐, 뭐처럼 오셨는데 상황이 이래서...! 버벅대는 보스의 꼴이 꽤 볼만 했다.


 “아니네. 나도 늦었으니 오히려 인사는 이쪽에서 해야지.”
 “아- 아뇨! 그, 그.... 우,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음. 그래....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말야.”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허겁지겁 호원이 소파에 자리를 잡아 앉는 사이 어르신은 먼저 걸음을 떼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는 주명을 향해 노인이 다가섰다. 이거 말일세. 그는 냉큼 주명이 가지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텁, 잡아챘다. 호원과 주명이 동시에 아. 소리를 냈다.


 “이거 어때 보이나? 꽤 괜찮았지?”


 노인은 흡족스럽게 웃으며 탈탈, 초콜릿 상자를 흔들었다. 겨우 한 알맹이만 꺼내 먹은 초콜릿상자는 남자의 손 안에 털털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노인이 그 말을 꺼내는 이유는 즉슨, 호원에게 해를 가하려 넣으려는 음식은 없다는 소리! 호원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어떠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주명을 응시하면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끌끌 혀를 찼다.


 “물론 괜찮죠! 어르신께서 이런 것까지 챙겨주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이제 어느 걸 받아먹을 어린 아이도 아니니까요. 손수 좋아하는 음식까지 챙겨주니 호원에게 있어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린 보스의 말에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상냥하게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릴적 꼬맹이가 영감 자리를 거뜬히 지키는 게 여간 기특해야 말이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거들어주겠네.”
 “가-감사합니다...!”
 “천만에. 이번 물건은 자네에게 있어 흡족한 물건이었으면 좋겠군.”


 ‘음.. 물건?’


 노인은 초콜릿 상자를 요긴하게 뜯어보다가 이내 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포장지 부분이 뜯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일 테다. 벌써 시험해본 건가? 그 말에 뒤이어 호원이 두 번의 의문이 들었다. 실험...?


 “이번 우리가 특별히 주선해서 만들어낸 것인데, 일반 암거래에서 구하는 것보다 쏠쏠한 놈이지. 어느 계집을 사용해본 건가? 효과는 어땠어?”


 “..저어, 무슨 의미... 신가요?”
 “? 설마 모르는 건가? 호원군.”


 노인은 초콜릿을 호원을 향해 내밀어 보이고선 말을 이었다.


 “이 특제 비아그라 초콜릿 말일세.”


 .......네?






*            *            *



 “아, 아... 으아...”
 “너- 말야.. 그런 쪽으로 일하는 사람이면 제대로 눈치 깠어야지!!!”
 “나, 난 몰랐... 아으”

 허엉..! 몰랐단 말야... 호원이 눈물콧물을 질질 짜며 훌쩍거렸다. 비틀비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부축하며 주명은 푹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런 놈을 보스로 올렸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노인과의 대화는 결국 오래 오가지 못했다. 그는 암거래 중에서도 ‘비아그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마약과 밀봉하여 다양한 루트로 거래하는 자였다. 호원이 먹은 초콜릿 한 알에서도 비아그라가 함유해 있던 모양이었다. 즉, 최음제 말이다. 최근 자신네 조직에서 가볍게 연구한 성과가 좋아 친분이 깊은 호원네 조직에게 넘기기 위해 샘플을 주었던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낼름 먹어버렸으니. 이렇게 멍청한 남자도 있구나 싶었다.

 초콜릿 비아그라는 30분 내로 빠르게 효과가 발효하는 성능을 지니고 있으며 나이대에 알맞게 3~6시간 길게 효과를 지속시킨다는 끔찍한 최음제였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호원을 두고 주명은 결국 이 대화를 끊었다. 오래 지속시켜 봤자 좋을 바가 없었다. 반강제로 노인을 돌려보낸 후 슬슬 열이 올라오는지 땀을 뻘뻘 흘리는 호원을 부축하며 주명이 방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겨우 놓여졌다. 흐물흐물해진 호원을 겨우 부축해 방의 침대에 눕혔다. 단정하게 자리잡던 정장자락이 잔뜩 흐트러진 채 호원이 몸을 웅크리며 히끅댔다.  

 “흐으, 주명.. 나- 수, 숨쉬기 힘들..”
 “그 영감탱이 말대로 효과는 좋나보네.”
 “나.. 장난 치는. 거 아니거든!”
 “이쪽도 장난 아니거든.”

 그러게 누가 아무거나 쏙 받아먹으래. 자업자득이라며 주명이 손을 내밀어 땀이 송글송글 맺힌 호원의 이마를 쓸어냈다.

 아, 차갑다. 온 몸이 홧홧 타오르는 호원의 몸을 조금이나마 식히려는 듯한 그의 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지, 오히려 더 발화제가 될 것 같은데. 숨이 점점 가빠져 오르고 제 몸이 제 거가 아닌 것 같다. 타오르는 몸이 조금씩 간지러워지기 시작하고 몸에 힘은 점점 더 쭉 빠져나온다. 그와 동시에 주명의 손바닥이 이마에 닿자 아흐,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흘렀다. 주명은 조금 놀란 눈치인 듯 했다. 두 눈을 크게 뜬 붉은 눈동자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차호원 너...”
 “아, 으아 그- 그, 게 아니...! 미안..!”
 “아니... 됐다. 자리 비켜줄 테니까 잘 풀고 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낸 주명이 다시 호원의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으려던 것도 잠시, 뚝 멈춘 그의 손이 어색하게 보였다. 음... 머쓱한 듯 제 목을 주무르며 시선을 돌린 주명이 몸을 일으켰다.

 ...에? 잠깐, 간다고??? 그 와중에 붙잡을 힘은 있던 건지 냉큼 일어서려는 주명의 바지자락을 호원이 붙잡았다.

 “잠깐 가지 마...! 으, 어떻게 좀 해주, 고...!”
 “..내가 뭘 어떻게 해줘? 계집이라도 불러?”

 주명이 인상을 콱 찌푸리며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딱 사절이거든. 네가 처리해야 할 거 혼자서 잘 풀어. 냉담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인 눈물이 대롱대롱 눈가에 맺혔다. 그런 거 필요 없- 거든..! 한 마디 마디를 입밖으로 토해내는 게 이렇게 버거울 줄은 몰랐다. 떼어내는 입술 틈까지 뜨겁고 가쁜 숨만 내쉬어진다. 간지러워.... 끄응. 잠시 작게 앓는 호원이 겨우 고개를 틀어 올렸다.


 “난, 주명이 아니면 싫.. 다고...! 누가 여자 불러달.. 허억.”
 “.....알았으니까 좀 천천히 말해. 너 숨쉬기 힘들다며.”

 바지자락을 붙잡은 호원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은 주명의 손끝이 살짝 붉었다. 얼굴빛도 지금의 호원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하면 꼭 이런 반응이었다. 뭐, 그게 귀엽긴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도 힘들다. 허억, 헉.. 넘어가기 힘든 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호원은 주명의 손을 잡아끌어다 제 뺨에 가져다 느릿하게 부볐다.

 “만, 져줘...”
 “...”
 “주명이 아니면 싫어...!”

 그것도 안 된다면.... 맞잡은 주명의 손바닥을 엄지로 잔잔히 쓸어내렸다. 손금 틈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희롱하듯 느릿하게 문지르는 사이 더운 열이 담긴 호원의 먹색빛 눈동자는 올곧이 주명을 향해 응시했다. 붉은 눈은 가만히 호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살 바닥을 쓸어내리며 이내 정장 소매의 틈을 노려 손목부터 검지 하나를 넣었다 살살 손바닥과 같이 손목을 문질렀다. 쪽, 마침표를 찍듯 가쁜 숨을 내쉬는 입술로 주명의 손바닥에 수없이 키스했다. 쪽쪽 소리를 낼수록 주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만져줄 수 없으면 내, 아.. 아, 내가.. 만지게 해줘...” 호원은 질끈 눈을 감은 채 열이 오른 입안에 틈을 열어 혀를 내밀고선 천천히 주명의 손바닥을 핥아 내렸다. 가만히 이를 내려다보던 주명이 하- 긴 숨을 내쉬었다.

 “너... 최음제 알고 먹었지.”
 “...”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 호원을 바라보며 주명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머리를 탈탈 털어냈다.







*            *            *





 “읏, 후....”
 
 끌어안는 손길까지도 예민함이 올라와 온 몸이 화끈화끈 따가워진다. 호원은 겨우 실눈을 떠 눈앞에 달라붙어 있는 주명의 눈감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워 있는 몸은 반쯤 일으켜 다가온 주명이 침대에 걸터앉으면 이미 게임은 시작종을 알리고 있었다.

 최대한 벌릴 수 있을 만큼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주명은 간지럼을 잘 탄다. 양 손을 목가에 얹어 살살 귓불부터 매만지면 그는 작게 어깨를 흠칫하며 동시에 더운 숨을 내뱉는다. 그 숨은 저절로 입안에 전해져왔다. 쪽쪽 깊이 입술을 눌러 붙이며 혀를 놀릴 때마다 호원과 주명의 숨이 고르게 섞여졌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을 새도 없이 깊은 키스에만 온 신경을 쏟아 붓는다. 어떻게 키스만으로도 갈 것 같지. 말끔한 주명의 눈을 감상하며 호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 신경이 예민했다. 온 몸이 만져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오른팔이자 연인인 그를 원하고 있었다.

 시간이 아깝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남자를 밀어내 올라타 내 걸로 만들고 싶다. 어라, 내가 이렇게 밝히던 사람이던가? 사고회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깊게 키스하고 싶다. 온 몸을 더듬으며 더듬어지고 싶다... 괴롭히고 싶다 괴롭혀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만져지고 싶다..
 
 “..차호원?”
 “....?”
 “..너 반쯤 정신 나갔는데...”

 괜찮아? 걱정스레 물어보는 주명의 물음이 새삼스러웠다. 괜찮아 너랑 키스하는 내내 어떻게 섹스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라고 안심을 주기엔 입 밖으로 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그가 만지작대는 사이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 풀어내며 그를 급하게 밀어냈다. 침대에 털썩 눕혀지는 시츄와는 다르게 반쯤 기대진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당황하든 말든 제 알 바 아니다. 몸 안의 깊은 곳까지 근질거리는 게 어서 빨리 해방감을 이루고 싶었다. 눈앞이 벌겋게 변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가득 부풀어 오른 가운데 부위는 아파올 지경이었다. 어느쪽이든 만져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이 남자는 너무 상냥해서 빠르고 거칠게 가는 법을 모른다. 당황한 남자의 뺨을 쓸어내리며 호원이 다시 주명의 몸에 달라붙고선 쪽쪽 목덜미에 입맞췄다.

 “야, 읏 너 뭐하는...”
 “아.. 괜찮으니까 빨리... 으윽, 으... 나 진짜 힘들거, 든 명아..!”

 흐아, 아. 호원은 자신의 배에 손을 얹고선 느릿하게 올라타 제 단추를 아래서부터 위까지 타닥, 닥 소리를 내며 풀기 시작했다. 벌겋게 물든 배가 부풀고 줄어들 때마다 흠칫 몸이 떨렸다. 드디어 마지막 윗단추를 풀어내고 나서야 호원은 단정하던 넥타이까지 잡아 쭉 내밀며 주명의 입술 끝에 넥타이 끈 끝을 넣어 물렸다. 진풍경이었다. 입을 작게 모아 헐떡이며 호원이 웃었다. 흡족한 듯 주명의 입가를 매만지며 무릎 위에 올라타 남은 빈공간 틈까지 그를 몰아붙였다.

 “상대는 힘, 하나도 안 들고 섹스하는 법.. 알아?”
 “...”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땀에 젖은 주명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의 안대를 벗겨냈다. 쪽. 강제로 왼쪽 눈가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누른 채 손에 든 안대를 침대 밖으로 휙 던졌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야 호원은 주명이 물고 있는 자신의 넥타이 끝을 따라 물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얇은 넥타이 끈 하나를 두고 깊은 입맞춤이 다시 시작됐다.








앤오님이 마피아 정장입고 최음제먹고 올라탄걸 계속 말하셔서 ㅋ

ㅋㅋ

씬을.. 끝까지.. 적기엔.. 용기가....!!!<<< 없었어요...!<.....죄송합ㅂ니다 하나도 안 .. 야하네요..

앤오님.. 공부 파이팅입니다... ㅠㅠㅠ










'차호원 > 여러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 (미완)  (0) 2017.11.18
비밀  (0) 2017.06.04
센티넬버스 1  (0) 2017.05.17
호구원이와트 (1~4)  (0) 2017.05.17
요괴AU  (0) 2017.05.17
차호원/패전국 2017. 5. 17. 22:57

> 罰




 *패전국AU

2017.03.25



 염원하던 복수는 끝났다. 호원의 양 손은 날카로운 칼을 쥐고 숨을 죽였다. 하얗게만 질려가던 말끔한 손이 드디어 염원하던 원수의 피를 흠뻑 적셨다.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려던 남자를 반대로 자신이 벼랑으로 밀쳐 보낸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나라의 선망 받는 힘 있는 왕이 아니다. 온갖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던 신하들은 왕에게 고갤 돌렸다. 그를 모시는 충신은 없다. 호원은 단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을 그 틈을 파고들었다. 왕은 폭군이라며 자신이 아끼던 신하와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당신에게 있어 이건 완벽한 배드엔딩 아니겠어? 찌르고 돌려 잡은 내내 호원은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왕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핏덩이를 뱉어냈다. 네가, 감히... 분노에 가득 찬 붉은 눈동자가 호원에게 닿았다. 그래, 감히 내가 찔렀어요 폐하. 속으로 꾹꾹 숨겨져 있던 목소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그저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깊숙이 들어가는 칼날은 추락한 폭군의 배를 쑤셨다. 벌건 덩어리가 남자의 값비싼 천과 바닥을 가득 적셨다. 남자는 자신의 피가 더덕더덕 붙은 손으로 호원의 머리채를 쥐어 잡으며 입을 벌렸다. 네가, 이런다고, 모든 게 끝, 날 거라고 생각하나?


 너도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이 몸을 해치는 것으로 네가 가볍게 넘어갈 줄 알아? 남자의 말이 맞다.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추락한 왕이라고 한들, 호원은 대역죄인의 입장으로 왕의 목숨을 직접 앗아갔다. 무엇보다 이 나라의 백성도 아닌 남자처럼 바닥 아래로 무너져 내린 패전국의 왕자. 모두가 아니꼽게 바라보던 저주 같은 존재인데, 그가 왕을 죽였다고 말한다면 다들 어떤 반응일까. 물론, 마음에 들지 않던 왕과 패전국의 귀속품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며 기뻐할 게 뻔하다. 나도 아마 죽겠지. 혼자 살아남은 죗값으로 지옥에 갈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내 사람들을 이리 만든 원수와는 함께 나락에 떨어지리라.


 “그게 바로 제가 원하던 겁니다 폐하.”
 “....”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던 피에 적신 손은 힘없이 툭, 떨어졌다. 더 이상 서서 말할 힘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호원은 찔러 쥐고 있던 칼을 놓으면 남자의 몸은 가볍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움찔움찔 소동물처럼 움직이는 왕의 모습에 멀리서나마 엿보았던 강인함과 공포감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는다. 나는,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야. 파르르 떨리는 손에는 남자의 피가 흥건하게 적셔 있었다. 더덕더덕 옷에 묻은 것도 남자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차림새였다. 하하- 호원은 실없이 힘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나는 살인마가 됐어.


 하지만, 아직 전부 다 ‘벌’을 처리한 건 아냐. 마치 뻣뻣한 목각인형이 뻐걱대며 움직이듯 호원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쾅! 우르르르.. 마치 하늘께서 노하신 듯 창밖에 구름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명을 질렀다.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왕의 안식처가 담긴 방 안엔 싸늘하게 남은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폭군과, 죄를 지은 살인마와, 또 하나의 왕이 있었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 마냥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저 약간 찌푸린 미간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달려온 모양인지 작게 숨을 헐떡이기도 했다. 폭군을 쏙 닮은 밝은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호원이 눈에 담으며 픽 숨을 내쉬었다.


 “바쁘신 차기 왕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무슨 일이야.”
 “....이곳이 누추한 곳은 아니지.”


 폭군을 뒤로 이을 현명하고 강인한 또 하나의 왕자. 호원이 둘도 없을 전우이자 연을 느꼈던 남자. 모든 것을 뒤엎고 이 모든 걸 방관하고, 배신하고, 나를 동정하며, 죄악감을 가진 왕자님. 그는 폭군의 일을 마무리할 유일한 왕으로 채택됐다. 국가 백성들과 충신들의 모든 신뢰와 존경심을 안긴 그는 다음 세대를 잇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며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점으로선 나도 동감이야. 호원은 뺨에 묻은 피를 그나마 깨끗한 천으로 슥 눌러 닦으며 주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혈질이고 곧잘 화를 잘 내며 심술을 부리긴 해도 그는 백성들 앞에서 왕자의 위치에 서면 누구보다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알며 마음을 잘 다스리고, 어떤 것이 정치인지를 알며, 무엇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돌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충신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라면 좋은 왕이 될 것이다. 내 원수라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후- 그는 복잡한지 쓰러진 자신의 혈육과 호원의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간이 없어. 그답지 않게 초조한듯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품속에 감추던 물건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깡! 소리를 내며 품에 감추었던 긴 장검이 호원과 주명의 사이로 떨어졌다. 주명은 문틈에 서있다 몇 걸음 다가와 호원의 앞에 섰다. 그는 결정했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며 호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뭘 망설여? 멀뚱히 칼만 내려다보는 호원을 향해 주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찔러. 줄곧 원해왔잖아.”
 “.....그렇게 되면 저하께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잖아?”
 “...내가 멍청이로 보여? 그 검, 어떤 검인지 너도 알고 있잖아.”

 마지막 전장에서 네 혈육을 직접 찔러 두던, 마지막까지 백성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수백 명의 피를 묻혀온 검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왕가의 문양이 박혀 있는 손잡이만 봐도 이 검이 자신의 나라를 베어온 주범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바닥에 나뒹굴며 쓰러져 있는 폭군뿐만 아니라 그 또한 자신의 원수였다. 혈육을 잔인하게 눈앞에서 살해하고, 살려 달라 할 때 눈길조차 건네주지 않았으며, 죽여 달라 할 땐 살라며 벌을 내렸다. 너의 가증스러운 손을 혐오해. 피처럼 물든 눈동자가 무서워, 미워, 죽여 버리고 싶어. 인사처럼 건네며 말했던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말대로,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자신의 머리를 짓밟으며 아바마마의 목을 베고 소름끼치게 웃던 남자는 지금 바닥에 굴러 꺽꺽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피를 품은 채 나라의 원수인 나머지 혈육이자 이 나라를 잇을 왕인 호원의 원수는 눈앞에 버젓이 서서 죽이라며 말하고 있다. 주명은 마치 그게 순리인 양 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맨 처음 주명의 방 안에서 칼을 내밀며 심장에 겨누던 때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이다. ‘이걸로 만족하진 못하겠지만.’ 순순히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호원의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 가만히 마주하던 붉은 눈빛을 떠올렸다. 지금과 같다.

 “난 이제 거절하지 않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칼을 쥐어들었다. 부드럽게 외이도로 감싸지는 손잡이를 쥔 채 주명을 향해 겨누었다.

 “그래.”
 “이건 벌이야. 주명, 난 네 형을 칼로 찔렀다고.”
 “알아. 보고 있었어.”
 “네가 같은 왕가의 사람이라면 똑같이 벌을 받아.”
 “그래.”
 “....죽어버려.”
 “...그래.”

 수많은 피를 묻혔다. 형제는 용서받을 수 없다. 씻겨낼 수 없는 벌을 주기 위해 호원은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그들을 죽일 것이다. 죽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의 벌을 내리고, 호원도 함께 죽어 둘을 데리고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것이다.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호원이 어두운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한 발자국 걸어 다가오자 주명은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주명의 버릇이었다. 밉게만 보인다던 붉은 눈동자를 눈에 담기도 싫다며 말한 뒤로 주명은 호원이 가까이 다가올 때면 시선을 돌리거나, 호원의 눈을 막거나, 동시에 본인의 눈을 감곤 했다. 그 쓸데없는 배려심에 호원의 속은 늘 꿈틀꿈틀 구역질이 올라왔다. 눈물이 나왔다. 이런 배려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만큼은.

 칼을 쥔 채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남자의 감겨 있는 눈을 향해 칼날을 세웠다. 꽉 다물어진 남자의 입술에 호원의 입술이 닿았다. 당황한 그가 뒷걸음질을 하는 사이 호원이 들고 있던 주명의 검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감겨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어느새 호원의 잠잠한 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잔뜩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호원은, 주명의 멱살을 콱 틀어잡으며 앞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가쁜 콧숨을 내쉬고 턱을 들어 올려 깊게 입술을 눌렀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을 수도, 꽉 몸을 밀어 붙일 수도 없었다.

 겨우 몇 초, 짧은 입맞춤이 전부였다.

 호원은 다시 콰르릉 울리는 하늘을 초첨으로 둔 채 붙여둔 입술을 떨어트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주명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야 겨우 나를 봤어.

 “...명아, 죽음으로 빗는 벌보다 더 가혹한 벌이 뭔지 알아?”
 “....”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넌 죽음보다 더 잔혹하고, 잔인한 벌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거야. 동시에 멍하니 선 왕자의 몸을 밀치고 호원은 뒷걸음질을 쳤다. 준비는 이미 마친 뒤였다. 어두컴컴해진 창문을 벌컥 연 채 호원은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나무를 타고 내리지 않았다면 완벽한 자살행위였다. “-차호원!” 크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명을 뒤로 호원은 바닥에 착지할 때까지 몇 번이나 몸을 굴렀다. 그러곤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  *



 하느님. 그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허억, 헉.... 아윽!”

 얼마나 뛰었을까 호원은 호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싸움 이후 검술은 제대로 손을 대본 적도 없었으며 운동이라곤 공을 만지작거린 것이 전부다. 나라가 무너진 후 끌려왔을 땐 제대로 몸 한 번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런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겨우 목숨 한 번 부지해 보겠다고 뛰어대고 있었으니, 한계를 뛰어 넘었다며 말하는 게 당연했다.

 주명의 의사는 아니었겠지만, 계산했던 것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호의병들이 호원을 쫓아왔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눈치 채자마자 공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의 심장을 겨냥하기 위한 화살이 속소포로 향해왔다. 다행인 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날도 어두워 제대로 겨냥하기 어려울뿐더러 화약에 적셔진 화승총은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그 점을 이용해 어두운 수풀들을 가로지며 호원은 달리고, 또 달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추격병들도 점차 발소리가 옅어졌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뺏길 위협은 사라졌지만 그와 반대로 자연에 의해 숨을 거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빗방울은 우수수 쏟아져 호원의 얇은 천자락을 흠뻑 적셨다. 흥건하게 젖었던 피가 그와 함께 씻겨 져 내려갔다. 숨은 점점 더 가빠졌고, 몸은 차게 식어버렸다. 중간중간마다 굴러 다친 상처들과 접지른 발목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다.

 “아.. 왁, 으아아..!” 언덕 위를 올라가려다 실수로 다시 발을 헛디뎠다.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얕은 절벽에 몸이 데굴데굴 떨어져 굴러갔다. 아파...!! 쓰라린 몸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메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후두둑 쏟아졌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몸에서 욱신대는 고통이 호원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무거웠다. 구른 몸은 쉽사리 일으키기 버거웠다. 여기까지다.

 ‘여기, 여기까지라고...’

 내 마지막. 더는 움직일 기력이 없다. 호원은 예감했다. 어느 정도 죽음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살아보겠다며 발버둥 치며 달리긴 했어도, 죽음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온 몸이 차가운 빗줄기로 적셔 흩어졌고, 쓰라린 몸뚱아리는 무겁고 아프다. 겨우 모아가던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벌을 받기 위한 단계일 것이다.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가야 하는 죄, 누군가의 목숨 값.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차호원은 죽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내려줄 벌에 모든 걸 맡겼다.

 백화 왕은 제 스스로 나락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그는 단기간에 무력으로 국가를 진압하고 십여 명의 노예들만 겨우 남겨둔 채 대부분의 인명피해를 남겼다. 그의 신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 눈앞의 권력에만 눈이 멀어 멀리 큰 그림을 볼 줄도 모른 채 백성과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이내 자신의 충신을 본인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제 스스로 무너진 채 벌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의 몫은 호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죽인 대가로 호원 또한 쓴 벌을 지금부터 맞이하는 것이다.

 ‘손.. 깨끗해졌다....’ 남자의 피가 물들었던 손은 다시 말끔해졌다. 쏟아지는 빗방울 덕분이었다. 지금도 빗방울 세례 때문에 눈앞에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손이 다시 씻겨 져 내렸다고 한들 내면의 피는 여전했다. 호원은 천천히 손을 그러쥐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이 아팠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호원의 내면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살려줘. 구해줘. 라는 바람은 더 이상 하느님에게 빌지 않는다. 그는 구원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내려질 벌을 고르며 떨어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까지 빌 거야.

 ‘네가 벌을 받기를...’


 너는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며 그 소중한 수많은 목숨에서 오직 나만을 구해냈다.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는 내 말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지키고 나만을 살렸다. 죽여 달라는 말에도 방관하며 듣지 않았다. 내 의사는 집어 던진 채, 남몰래 형에게 나를 살려달라며 빌었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까지 날 살리려고 했어. 그게 네 죄야. 사실은 전부 다 알고 있어도 난 너에게 절대 감사하다고 말하지도 살려달라고 하지도 않을 텐데.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기에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
 
 ‘하느님, 벌을 내려주세요.’ 잠이 몰려왔다. 점점 더 내려 감기는 눈꺼풀에 간신히 힘을 준 채 호원은 끅끅 울음을 삼켰다. 가장 증오스러우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환상마냥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보이는 건 비겁하잖아. 또륵또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빗방울과 섞여졌다.

 그에게, 벌이 내려지기를.

 ‘절대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리에 얽혀 맴돌기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홀로 남겨진 채 너는 왕위에 서게 될 거야.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현명하게 나라를 통치하며 평생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야 할 왕이 될 거야. 권력에 눈이 먼 그와는 다르게 올바른 것을 볼 줄 알고 걸음을 내딛을 줄 아는 현명한 왕이, 되며 넌 평생 벌을 받아낼 거야.

 언젠간 자신과 걸 맞는 죄 많은 여인도 만나겠지. 그녀와 혼약을 맺고 결혼도 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가지겠지. 너처럼 시뻘건 눈동자를 가진 채 까만 흑발을 가진, 만져보고 싶은 반곱슬 머리카락 말야. 똑 닮은 아들이나 딸 하나씩 가진 채 평생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벌을 받을 거야. 넌 그렇게 평생 남을 위해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런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나 같은 존재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한 머리로 나라와 가족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몸이 되는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하느님, 부디 그 사람에게 그런 끔찍한 벌을 내려주세요.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을, 평화롭고 지루한 나날이 가득한 삶이 그에게 영원하기를. 그저 불운했던 나와의 존재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화목하게 그의 사람들과 함께할 그런 지루한 벌을 내려줬으면 좋겠어요.

 호원은 눈을 감았다. 촉촉한 눈가가 눈시울을 가득 붉혔다. 잠이, 잠이 몰려왔다.

 평생 그런 벌을 받고, 살아가고. 그런 식으로 끝나면 또 좋게?
 아냐, 아냐 명아. 넌 죽고 난 다음 윤회를 거쳐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벌을 받게 될 거야. 차라리 지금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만한 네게 아주 끔찍한 벌.

 하느님.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벌을 주명에게 내려주세요.

 아주 먼 시간이 흐르고 흘러, 국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땅이 일궈지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고 나서. 네가 다시 태어났을 땐.

 ‘그 사람에게 나와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는 벌을 받게 해주세요.....’

 지금처럼 전쟁이 발발한 삶이 아닌 평온하고 그저 깨끗한 시간만 이어지는 나날에서 네가 태어나 나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사는 거야. 불쌍한 주명, 불운하고 재수없는 나에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야. 넌 살고 죽고 태어난 그 순간까지도 나와 다시 붙게 될 거야.

 그땐 이런 전쟁도 없을 거고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될 거고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될 거고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아도 될 거고 

 그렇게 함께하고

 예전처럼 웃고 울고 화내고 떠들고를 반복하면서 살아갈 거야.
 우린 예전처럼 같이 공부를 하며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돌아가고 나가는 길 전부 함께 걸어가게 될 것이다.
 멀리서 편지를 보내며 서로 안부를 물어볼 필요는 없이, 애증에 찬 눈으로 폭언만 뱉어낼 필요도 없이
 웃으면서, 만지면서, 입맞추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이가 될 거야. 

 그런 벌이, 네게 내려질 거야.
 내려졌으면 좋겠어.

 “....주, 명..........”

 쩍쩍 말라붙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울분 가득한 소리를 눌러 삼킨 채 호원은 간신히, 동시에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 대신 빗줄기만 주룩주룩 쏟아졌다.


 ‘벌을 내려주세요.’

 딱 한 번,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함께 할 기회를 주세요.
 
 “주명....” 무겁게 내려지던 눈꺼풀을 이내 내리감으며 호원이 작게 웅얼댔다. ‘허, 한 번만 불러라. 이름 다 닳겠다.’ 쯧 혀를 끌끌 차며 제 부름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앳된 주명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호원은 키득키득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색하지도 분에 차지도 않은 그저 기쁜 듯한 남자의 미소였다.

 ‘이렇게 불러야 네 눈이 나를 봐주잖아!’ 명아 눈, 볼 때마다 반짝거려서 정말정말 예쁘거든. 호원이 키득대며 웃었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더 말해주고 싶었어.








이 전에 더 쓰고싶은 내용은 많았지만....


주명이 이러이러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 라는 부분을 써보고 싶어져서 쓰게 됐다...


죽..은건 아니구요 저러다 성당 수녀님한테 거둬져서 성당 자체가 외딴 장소에도 있구.. (주명 나라의 아슬아슬하게 국경 외 근처에 있다.) 봉사 하면서 신부님 행세..? 신부님 일..? 배우면서 살ㄹ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차호원/조각조각 2017. 5. 17. 22:56

좋아하는 점 1



너의 이런 점이 좋아.

2017.03.19



1.

 


 사실은 난 그렇게 아침형 인간은 아니다. 학교 방학 내낸 부엉이 생활을 즐길 정도로 밤과 새벽을 달리는 것을 좋아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매번 곤욕스러워 엄마께 꾸중을 매일같이 들을 정도다. 일어날 때의 나른함과 미처 채우지 못한 피곤함에 끙끙대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는 과정이 싫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와 함께한 날부턴 아침이 그렇게 싫게 만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피곤하고, 나른한 건 똑같지만 그게 정말 이상하게도 말야.


 짹짹거리는 새들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맞추어 둔 핸드폰 알람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람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굳이 손을 뻗어 핸드폰 알림을 끌 필요도 없다. 너의 길쭉한 손이 먼저 뻗어 익숙하게 내 핸드폰을 만지작대더니 시끄럽게 울리던 알람을 꺼버린다. 눈을 뜨지 않아도 그 상황이 훤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꼬리를 그려 올리며 크크, 웃어버린다. 그러면 넌 잠시 멈칫 하더니 “일어났으면 말 좀 하지?” 라며 아침인사 대신 말을 건다.


 나처럼 만만치 않게 잠도 잘 자는 잠만보면서 그는 이상하게 나보다 먼저 곧잘 일어나는 습성이 있었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에, 일 때문에 아주 가끔 출근하는 주제에 꼭 아침에 일어나 내가 출근하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밖을 나가면 그제 서야 다시 잠자리에 든다는 걸 알고 있다. 일어나고 나가는 모습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지켜다 주는 그런 네 배려가 좋았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마주하는 너의 붉은빛 눈동자가 좋다.


 그건 태양빛과는 조금 다른, 가히 눈에 담기 어려운 햇빛보단 조금 잔잔하고 부드러운 빛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며 천천히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 마을단지 사이로 자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태양은 붉은 노을빛으로 온 세상을 덮었다. 단풍마냥 따뜻한 붉은기의 색은 너와 쏙 닮았다. 그 눈을 보는 게 마냥 좋았다. 손이 다가온다. 조금은 차가운 기운이 돌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네 손길이 얼굴에 닿았다. 말은 투박하고 서툴고 쌀쌀맞으면서 나를 대하는 손길과 시선만은 누구 못지않게 달고 상냥했다. 그런 네 점이 좋았고, 여전히 좋아했다.


 “잘 잤냐?”
 “응.”


 좋은 아침, 명아. 채 떼어내지 못한 잠결에 풀어진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가까이서 웃음을 참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응, 좋은 아침. 인사를 받아준 네 얼굴을 따라 손을 뻗어 보다가 뺨을 매만졌다.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따라 다가온 네 얼굴이 금방 간격을 좁혔다. 살짝 까칠까칠한 입술과 제 입을 맞추며 나는 다시 한 번 나른해진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아침은 여전히 일어나기 힘들었다.






2.


 어리광 담당이 있다고 하면 그건 아마 고민할 새도 없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 둘 사이에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이다. 난 네게 매달려 징징거리는 일이 많았고, 그런 넌 나를 밀어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빈번했다. 주로 내 쪽이 떼를 부리는 게 많아 우리는 자주 투닥거리고 싸우기도 했다. 아주 가끔, 가끔은 그런 나의 어리광을 받아준 넌 한숨을 푹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맡기며 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가끔, 나의 가끔보다도 아주 더 가아아끔의 드문 일로 네가 먼저 다가오는 일이 있다. 남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 주명이 너에게 어리광을 부린다고?’ 참고로 말하자면, 이건 그에게 알코올의 힘이 들어갈 때가 아니다. 그때의 주명은 어리광보단 순전히 어린아이의 귀여운 애교에 가깝다.

 이건 아이보다도, 아마 어른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차호원....”
 “...어...”

 이런 주명은 정말 나밖에 모를 거야. 아니, 나만 알았으면 좋겠어. 막 저녁식사도 끝내고 돌식이와 함께 느긋한 여가를 보낸 것도 끝났다. 시간은 시침이 아홉시 남짓하게 가리키고 있었고 아빠들이랑 실컷 놀은 아이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 곤히 잠에 들어 있었다. 이 시간이면 슬슬 나도 잠자리를 들기 전에 마무리 단계를 끝내야 했다.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를 미리 끝내기 위해 단단히 고무장갑을 조여 쓰며 숨을 들이켰다. 금방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주명에게 가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먼저 상대가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마무리 단계를 잡지 못한 설거지 거리들은 내 손에 잡혀 있었다. 거품이 잔뜩 묻어난 장갑을 끼고선 달뜬 숨을 토해냈다. 아마 뒤에 매달린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먼저 다가온 넌 자연스럽게 뒤에 매달려 내 몸을 끌어안았다. 꽈악 앞치마를 쥐는 네 양 주먹이 신경 쓰였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숨결 하나하나까지도, 가라앉은 목소리까지도 전부. 내 얼굴은 이미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끔, 어리광을 부리는 네가 좋아서 가끔은 정말 죽어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곤 해.

 “..저, 주명... 나 아직 설거지 하고 있..는데..”
 “...”
 “...라고 해도 변명거리도 안 되겠지...”

 꽈악 끌어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이 삼켜졌다. 내 어깨에 요지부동으로 고개를 파묻고 있던 너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린 듯 했다. 목가에 닿는 검은 머리칼이 나를 간지럽혔다. 너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냈다. 더운 숨결이 귓가에 닿는다.

 “...그래서, 싫어?”

 아니아니
 완전 좋은데요!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올 뻔한 목소리를 간신히 눌러 삼키며 끙, 앓았다. 나는 그의 어리광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마 그를 사랑하는 평생 내내 그렇게 지면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게 딱히 나쁘고 억울한 느낌으론 들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엄청 좋다.

 천천히 고무장갑의 끄트머리를 잡아 벗겨냈다. 이젠 아이가 범접할 수 없는 어른만의 시간이다. 배에 머무는 네 손을 잡아다 올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파묻고 있는 주명과 시선을 맞췄다. 둘다 열이 서려있다는 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픽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이 멈추면 먼저 네 쪽으로 입술이 붙여졌다. 그 의사를 거부하지 않고 끌어당겼다.

 막 잠근 주방 씽크대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린 고무장갑 끄트머리에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결과 짧은 탄성 섞인 소리가 오랫동안 오갔다.





3.


 “응? 웬일로 돌림판을 다 꺼냈어?”
 “손이 심심해져서.”

 뭐처럼 휴일이었지만 어디도 나가기 귀찮았던 판에 집에 눌러 붙어있기로 했다. 주명도 막 마감도 끝내고 푹 잠에 들었던 덕분인지 쌩쌩해 보였지만 우리 둘은 어딘가 심심해 보였다. 하지만 마땅히 옷을 갈아입고 나가기도 귀찮으니 집에서 시간을 떼울 수밖에. 나는 적당히 빵집에서 사온 조각 케이크를 들고 덜렁덜렁 입에 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적당히 낮잠시간이 된 돌식이는 제 집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명은 이 심심함과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사이 창고에 다녀온다고 잠시 밖을 나간 주명은 곧 조금 큰 크기의 돌림판을 끙차 하며 가져오고 있었다. 돌림판은 도자기를 빗을 때에 쓰는 물레였으며 그가 아직 학생이었을 시절, 동아리에서 쓰고 있던 물건이었다. 착실히 동아리에 매진했던 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능숙하게 돌림판으로 예쁜 도자기를 빗어내고는 했다. 취업을 한 이후 마감에만 전전긍긍해 시달리면서 바빴던 터라 그 후의 도자기를 빗어내는 건 보기 드물었는데.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입에 쏙 넣으며 난 너를 신기한 듯 응시했다.

 한 번 마음을 먹은 넌 속전속결로 준비를 마쳤다. 도자기의 흑을 준비하고 자리를 잡아 판을 돌리기 시작한다. 절그럭 소리를 낸 도자기는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능숙하게 잘만 돌아간다. 네가 만져서인 덕분일지도 모른다. 주명은 뿌듯한 얼굴로 만족스럽게 판을 돌려 덩어리 진 흙을 조금씩 좁혀 모양을 빗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소파 위에 누운 채로 가만히 지켜다 보았다. 우린 마치 고등학생 때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하는 너를 지켜보며, 시간을 때우는 나. 도자기 하나에 온 신경을 쏟아 붓는 네 집중어린 얼굴은 나의 눈을 빼앗았다.

 나는 도자기를 빗는 너의 손을. 아니, 네가 닿는 모든 손길을 좋아한다.

 섬세한 손길로 도자기를 빗어내는 손이 그땐 마냥 부러웠다. 주명이 집중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있지만, 반쯤은 질투하는 마음으로 부럽다는 듯이 도자기를 보았을 때도 있었다. 저 손길이 내게 향했더라면 좋을 텐데. 저 도자기가 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도자기의 틈을 파고드는 손길이 내 머리를 꾹꾹 누르며 쓰다듬어주고, 기둥을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손길은 대신 나를 어루만져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리고 그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기둥을 세워 틈을 파고들어 속을 파내는 세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은 전부 나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손은 내 머리와 뺨을 매만져주고, 때론 세게 당기기도 하면서, 달래듯이 어루만져주기도 해. 그리고 그런 행위를 매일같이 할 때마다 고개를 올려 네 얼굴을 확인해보면 아주 신기하게도 도자기나 공예품을 만들던 그때의 집중된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보다도 더 열과 욕정이 서려있고, 간절해 보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때와는 다르다.
 깨끗한 손이 능숙하게 도자기를 거의 다 빗어갈 때 즈음에,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벌렸다.

 “명아”
 “어.”
 “명아!”
 “왜- 거의 다 완성 되어가니까 조금만 기달..”
 “나 섹스 하고 싶어!”

 쾅-! 예쁘게 빗고 있던 도자기가 순식간에 박살이 난다. 주명의 손이 어긋나 찌그러진 도자기의 흙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잠시동안 부들부들 떨고 있던 주명이 빽 소리를 지르며 호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드러난다. 이, 이런 미친 차호원...! 잔뜩 당황한 입이 어버버 대며 버벅거렸다. 호원의 말에 심하게 동요한 것 같았다.

 “이, 이 발랑까진...”
 “그치만!”

 냉큼 네가 있는 앞으로 다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잔뜩 당황한 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눈에 들어온다. 귀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쭉 얼굴을 내밀어 무방비한 입술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맞췄다.

 “그 도자기 대신 날 만졌으면 좋겠어.”
 “...야, 너..”
 “아니면 내가 만져줄까!”
 “...진짜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확실히 고등학교 때를 비교하면 지금이 용 됐기는 했네. 착잡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주명을 바라보며 나는 싱글벙글 웃기 바빴다.

 그런 너도 정말 좋아.



 





'차호원 > 조각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스할까  (0) 2017.05.17
주명 자컾 해시  (0) 2017.05.17
해시태그  (0) 2017.05.17
차호원/여러 AU 2017. 5. 17. 22:55

센티넬버스 1

2017.03.12



 첫 번째 각인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옆집에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였다.


 “신난다! 원이 네가 내 가이드야?”
 “...? 으, 응. 그런가 봐!”
 “아싸! 잘 부탁해!”


 이제 계속 만나서 놀 수 있겠다! 잔뜩 신이 난 친구 기섭이 호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작고 앙증맞은 손은 아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내밀어줬다는 사실만이 기뻐서 기섭의 손을 잡으며 실실 웃었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선택된 센티넬이나 선택받은 가이드인들 겨우 7살 남짓한 아가들이 뭘 알겠는가.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여겨지는 센티넬들은 세계적으로 다양한 능력들을 쥐고 있고, 그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 다양한 지배력들을 쥐고 있다. 하지만 신에게 사랑받은 몸이라고 한들 인간이 그 능력을 전부 다 제어할 수는 없는 법. 혼자서 그 능력을 다스리다간 언젠가 머리가 미쳐버려 그대로 죽어버린다고 한다. 홀로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외로움쟁이 센티넬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종족을 만들었다. 능력은 별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유일하게 센티넬의 몸을 제어시킬 수 있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라는 종족이었다.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흔하게 태어나지 않는 종족들이지만 이들은 유전적으로 대를 잇고 태어나거나 이따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태어나기도 한다. 각자마다의 수치도 구분되어 있고 높은 자들은 그만큼 수치가 높은 상대를 고르기도 한다. 골라야 하는 이유는 간단. 센티넬이 상대의 가이드와 정확한 각인을 맺어야 능력에 좀먹히지 않고 오랫동안 부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각자의 능력이 발화하면 센터에 등록해 때로는 일반인처럼, 때로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역할로 각자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센티넬 가문이라면 센터에 배치되어 있는 높은 수치를 가지고 있는 가이드를 돈을 쥐어 직접 사들이거나 가문대 가문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호원과 기섭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 쉬이 입을 담아 말할 수 없는 명문 재벌 집 가문은 아니었지만 전통적으로 가이드를 배출해내고 있는 차씨 가문은 조금씩 센터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고, 그런 호원이 처음으로 발탁된 상대 센티넬인 기섭네 가문은 정부축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중축의 센티넬 가문이었다. 무엇보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고이 자란 기섭이 상대로 호원을 선택했으니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날은 없었을 거라며 호원의 할아버지는 말했다.


 “우리 축구하러 가자!”
 “응!”


 복잡한 센티넬과 가이드의 세계였지만 정작 단짝인 두 남자아이는 서로 놀기 바쁘다며 어른들의 이야기는 흘겨듣고 공을 들고 나가기 바빴다.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무슨 상관인가? 둘은 각인을 짓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고, 그런 우스운 관계보단 친구라는 사이가 더 중요했다.
 ‘넌 장차 우리 가문을 지탱할 가이드다 원아.’ 라고 말하던 할아버지의 잔소리도 싹 잊어버렸다. 호원은 가벼이 생각하며 공을 든 기섭의 뒤를 따랐다. 가이드는 계약 파기 전까지 무슨 일이든 센티넬의 곁을 맴돌아 지켜야 한다. 라는 교육식의 말 같은 건 금방 백지화가 되어버렸다. 할아버지의 맹렬한 가이드 교육은 속수무책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안일한 생각에 벌을 받은 것이다.


 “....섭아..?”


 툭! 데구르르. 축구공은 도로변에서 굴로 호원의 발틈에 굴러왔다. 멍하니 부른 호원의 부름에도 기섭은 침묵을 유지한 채 차가운 시체로 남아 도로 위에 누워 있었다. 벌겋게 물든 아이의 몸이 마치 인형 같았다. 한 번 떨어트렸다는 이유로 와장창 깨져버린, 어머니가 아끼시던 유리 인형.
 ..아, 설마? 그제야 허겁지겁 축 늘어진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처음으로 센티넬을 위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였다. 할아버지에게 교육받은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며 힘을 불어넣었다. 손기에 느껴질 따뜻한 온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책에 실려 있는 따뜻한 느낌이 돈다는 것과는 달리 손에 감싸진 기섭의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고, 또 축축했다.
 
 그건 저주의 시작이었다.



*  *  *



 제대로 각인이 되지 않은 미각인 상태라고 해도, 각인을 맺기로 한 상태에서 곧바로 일어나버린 사고는 세간의 관심이 꽂혀버렸다. 우연적인 뺑소니 사고일 뿐인데도 기자들은 가이드의 악영향이라며 오보를 냈고, 호원을 저격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단 7살, 가이드라는 이유로 친구를 눈앞에서 잃은 충격을 고쳐낼 새도 없이 수많은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은 건 지금도 호원에게 있어 트라우마로 남았다. 불운은 그렇게 시작됐다.
 겨우 물이 오르던 차씨 가문의 가이드들은 센티넬에게 저주를 불러온다며 직접 돈으로 사들이는 센티네들이 기피 대상 1위로 낙인되어 버렸다. 할아버지로선 애통한 일이었다. 그 탓에 다음에 맺으려던 센티넬들의 후보들이 쏙쏙 빠져나가고 몇 년 동안이나 맺으려던 약조가 깨져 버렸으니. 결국 나이 15살, 까이고 까이고를 반복하며 호원은 두 번째 센티넬을 맞이했다.


 “아, 그쪽이 저주내린 가이드구나!”
 “...차호원인데요....”
 
 나이 32살 여성과 나이 15살 소년. 누가 봐도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땅꼬맹이를 보며 30대 센티넬 여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본 그녀는 양 품 안에 잘생긴 가이드 두 남자를 껴안으며 신기한 듯 호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명문있는 센티넬 가문의 셋째 자녀인 그녀는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가이드 수집을 하던 중에 이리저리 쫓겨나던 호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여성은 거부감 없이 가이드인 호원을 계약직으로 맺겠다며 불러냈고, 이번에 둘도없을 기회라며 할아버지는 호원을 냉큼 보냈다. 결국 학교가 파하기도 전에 책가방을 매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온 호원에겐 거부권은 없었다.


 뭐야, 소문이랑 달리 그냥 꼬맹이구만. 그녀는 호원의 모습에 조금 실망한 듯 보였다. 쭈뼛거리며 다가온 소년을 향해 손을 휘적대며 입을 열며 말했다.


 “방은 집사들이 안내해줄 테니까 거기에서 쉬고 있으렴.”
 “아, 아! 네... 그, 근데 저... 각인은...?”
 “갓 성인도 안 된 꼬맹이랑? 꼬마야, 각인 맺는 법은 알고?”


 꺄르륵 웃으며 되묻는 그녀의 말에 호원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야...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단 한 짝밖에 맺지 못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각인 맺기는 ‘타액 공유’였다. 평생을 함께 할 사이라고 정한 상대나 보통의 각인 관계는 일반적인 성관계를 통해 각인의 매듭을 짓지만 이를 선호하지 않는 자들은 타액이 섞인 잔을 교환하거나 입맞춤으로 통일 짓고는 한다. 다만 제대로 된 성관계로 맺어진 각인이 아닐 경우엔 완벽하게 센티넬과 가이드의 상호관계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애초에 가이드의 역할은 센티넬의 폭주를 맞기 위한 ‘제어제’ 역할이니 제어하기 위해선 접촉을 목적을 기반해야 한다. 호원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여성은 옆에 안고 있던 남성의 뺨을 쓰다듬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도 된다면 제대로 각인을 맺고 싶지만~ 이 오빠들도 있어서 말야. 한 명이랑만 관계를 맺는 건 조금 어렵지? 특히 너 같은 어린 애랑은.”
 “네?! 그, 그럼 각인은 어떻게...!”
 “나중에 각인 주사 따로 보낼 테니까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 주사라면...”


 새로 개발된 각인 맺기용 주사기는 호원도 얼핏 내용만 들어보았다. 원래는 단 한 짝밖에는 맺을 수 없는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다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용으로 새롭게 개발된 것이었다. 상대 센티넬의 혈액과 특별한 용액이 주입된 주사기를 맞으면 본래 각인된 센티넬이 있다고 한들, 또 하나의 다른 센티넬을 상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일시적이지만 몸으로 관계를 맺은 센티넬처럼 같은 효과용 제어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비한 주사기.


 “...하지만, 가이드가 그 주사를 맞으면 그만큼 부작용으로 고통스럽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싫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내가 널 얼마로 사들였는데. 게다가 너, 너 때문에 센티넬도 죽었었다면서. 그거 다 듣고도 감안하고 사온 거야. 그 정도 값은 해줘야 할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사납게 쏘아 붙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이 호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그녀와의 다음 대화는 없었다. 집사로 보이는 사람의 안내를 따라 쭉 방 안에 대기를 해야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의 센티넬 기운이 흐르는 피가 섞인 주사기가 덜렁 준비해졌다. 여기에 사는 다른 가이드들도 나랑 같은 주사를 맞고 있을까? 여러 의문과 함께 호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팔에다 주사기를 맞았다.
 그 날은 종일 온 몸에 화끈화끈 열이 나 새벽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끙끙 앓아야만 했다.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할 때까지 흐르고 또 흘렸다.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호원의 애석함을 대신 전했다. 사지가 다 뜯겨나갈 것 같았고, 뜨겁고 뜨거워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이라도 각인이 된 거니까. 더 이상 저주저주 놀림받을 이유도 없을 테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끊이질 않는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참았고, 호원은 어서 빨리 그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호원을 찾는 일은 단 한 번도 없게 되어버렸다. 호원이 각인 주사를 틈틈이 받기 시작한 지 한 달 채 넘어간 일이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스트 가이드들을 품에 끌어안고 드라이브를 하던 그녀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오토바이와 충돌해 그대로 즉사해버렸다.

 그렇게 두 번째 가이드를 잃어버린 채, 몸은 덜렁 부작용만 남은 채로 호원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  *  *



 세 번째 센티넬은 온 얼굴에 기분 나쁜 주름이 진 70대 할아버지였다. 당시 호원의 나이는 19살. 그는 다시 학교에서 야간 자율을 하기도 전에 덜렁 가방만 메고 웬 삐까뻔쩍한 차를 타고 끌려가야만 했다.


 “차씨 영감이 자네를 소개해주더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네. 치수는 무려 200을 뛰어넘는 상급 가이드가 안 좋은 일이 겹쳐 짝을 못 찾았다고.”
 “....하하, 네.... 부득이하게도요...”
 “딱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말게. 특별히 내가 자네를 거둬주지. 굳이 다른 센티넬을 찾으려 헤맬 필요도 없지.”


 진작 얘기만 해줬으면 미리 만났을 터인데. 아쉬운 듯 쯧쯧 혀를 차는 영감의 모습에 호원의 몸은 점점 더 작아졌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쉽사리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중소 기업 몇 개를 운영하고 있는 나름의 이름 알린 기업의 회장님이었다. 젊었을 적 센터의 탑에 들어갈 정도로 능력을 거뜬히 발휘한 센티넬이라고도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가이드 모두가 이 남자를 꺼릴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배우는 가이드 교육에 나온 영감의 이름에 할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해왔으니 잊을 리 없었다. 이런 별종은 눈이 마주치지도 말아야 한다며.


 ‘그렇게 말했는데... 나한테 말도 없이 이 할아버지를 붙여준 걸 보면....’


 “각인식은 될수록 빨리 진행하는 게 좋겠지. 집 쪽에 동의도 얻었으니 오늘은 우리 쪽 집에 머물러 가게나.”
 “네? 그, 그치만 따로 연락은...!”
 “괜찮대도.”


 앞으로 계속 함께 할 사인데 뭐가 어렵다고. 금이빨을 씩 드러내며 웃는 꼴이 호원의 눈에는 메스껍게 느껴졌다. 그는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며 호원의 의사도 없이 덥석 손을 잡고선 주름진 손을 그 위에 덮었다. 느릿하게 조물딱 거리는 손길에 호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손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호원을 내다보는 끈적한 시선이 역겨웠다. 귓가에는 벌써부터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젓던 꺼내던 말이 울린 듯 했다.


 그 영감은 틀렸어! 쯧... 제 나이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지. 남색을 밝히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지...


 이제껏 가이드와 맺은 숫자만 해도 열댓이 넘지만 그의 성적 희롱에 질려 나가떨어진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가이드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 계약을 해지하고 나올 수 없었다고. 각인을 풀자고 말한 가이드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며 그들의 꼬리도 찾기 힘들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분명 나가겠다고 하니 다른 센티넬에게 보낼 바에야 아예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넌 절대 그런 놈들에게 꼬이지 마라 원아. 라며 서툰 손길로 어린 손자를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기억은 아직도 선선했다.

 그랬는데,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가 정작 호원과는 아무 말도 없이 먼저 선동해서 이 영감에게 가이드로서 소개시켰다. 돌아오는 배신감과 죄악감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팔아졌다고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호원은 튀어 나오려던 눈물을 꾹 삼켜냈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저주내린 가이드라고 불릴 정도면 이젠 별로 각인같은 건 맺지 않아도 되잖아. 각인, 그게 뭐라고... 가문의 영광, 그게 다 뭐라고......


 ‘차라리 이렇게 팔려갈 거라면......’


 “20분 내로 도착할 테니 눈 좀 붙여두게. 이야기는 그때 가서 천천히...”
 “...............텐데.”
 “응? 방금 뭐라고...”


 차라리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건 마치 반갑게 들리던 저주의 재시작이었다. 운전석에서 핸들을 돌리던 기사의 숨소리가 커졌다. -빠앙! 클락션 소리와 함께 호원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던 능구렁이 영감은 눈앞에서 바로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차가 장난감처럼 데굴데굴 도로변을 굴러 전봇대에 꽂혔다. 안전벨트에 단단히 묶인 호원은 그대로 차 안에서 기절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호원뿐이었다. 차의 타이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니면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모두가 수군거리던 말 대로 가이드의 저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던 건지 차사고는 다시 한 번 발생했다. 밖으로 튕겨져 나간 영감은 그대로 죽어버렸고 운전석에 자리 잡던 기사님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오직 호원만. 그는 살아남았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운도 지지리 나쁘면서 이럴 때면 용하게 살아남는다. 눈을 떴을 때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다보던 할아버지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호원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젠 다신, 각인 같은 건 맺지 않을래요. 차라리 정말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고인 눈물이 또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왜 항상 내가 맺으려던 짝들은 모두 죽어버리는 거지.



*  *  *



 인정하자.
 차호원은 저주내린 가이드다!


 애초부터 누굴 센티넬로 받아들여 짝을 만들 생각 따윈 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짝을 찾아보고 세 번째 센티넬까지 관계를 맺을 뻔 했지만 정작 성사된 건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들을 전부 죽음으로 몰아버렸다. 더 이상 호원을 찾는 센티넬은 없었다. 제 아무리 수치가 높은 뛰어난 가이드라고 한들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이들을 찾아보겠다며 손을 떼어냈다.


 이 가문에 먹칠하는 미련한 놈 같으니. 어릴 적에 그렇게나 자상하던 할아버지도 이젠 호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원의 뒤를 잇는 두 동생 다 호원보다는 수치는 낮아도 뛰어난 가이드로 태어난 것이다. 호민과 호천은 나름 이름 날린 센티넬과 계약을 맺어 거덜나려던 가문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두 동생들은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정작 장남이라는 놈이 저래서야 써?! 이젠 얼굴만 볼 때마다 으르렁 이를 가는 통에 호원은 쉽사리 본가로 돌아가기도 힘들었다. 결국 대학을 들어가 기숙사에 쭉 지내고 취직을 하고 나선 부랴부랴 단칸방을 구해 집을 나와야만 했다.


 간호사로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 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매일같이 할아버지와 1 : 1로 가이드 교육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고 제대로 놀지 못했었다. 가이드로서 일했다면 분명 24시간 내내 센티넬의 일에 따라 센터 일을 맡아왔을 것이다. 그래도 그 편이 더 살기는 쉬웠을 걸. 적어도 막노동은 아니라며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지만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이대로 만족해. 간호사로서 환자들과 웃으며 지내고, 버거워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어떻게 보면 센티넬을 위해 가이드로서 일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배시시 웃으며 호원은 다시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걸로 만족한다고.


 ...만족하는데.....



 “...그러니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
 “응- 안 돼^^”


 단호하게 호원의 말을 잘라낸 흑발의 남성은 말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양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난 분명히 만족한다고 했는데. 전과는 다른 의미로 땀을 뻘뻘 흘리던 호원은 마치 조직 폭력배처럼 커다란 등치의 두 남자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호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센티넬 센터의 중앙지점에 위치한 이 남자 전용 사무실이었다. 남자의 비싸 보이는 테이블 위엔 값비싼 양주와 잔 몇 개. 그리고 남자의 현직을 알리는 이름표가 부착되어 있었다.


 [백화 이사] 제 아무리 무지한 호원이라고 한들 이 남자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센터의 중추를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그는 이미 수십 명의 센티넬들의 몫을 단 한 명으로 거뜬하게 수행하고 있는 요원이라고 들었다. 센터에서 일하는 것뿐만이 아닌 이미 기업의 몇 개를 꿀떡 삼켜 회사의 주주로서도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뒷배경도 장난이 아니겠지. 이 이야기를 들은 건 호원이 중고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귀가 닳도록 얘기해준 것이었으니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남자의 위치는 배로 더 커졌을 것이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곱슬의 긴 흑발 머리는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단정해 보였다. 여자는 여럿 울렸을 법한 얼굴도, 쫙 차려진 정장과 길쭉하게 뻗은 다리는 능숙하게 꼬아 올린 채로, 마치 천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어딘가 호원을 공포감으로 서리게 만들었다. 자신과 절대 엮일 리 없는 이 남자는 어째서, 왜 날 찾은 거지?


 정확히 이곳으로 오게 된 건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야간근무로 잔뜩 지친 호원이 병원 입구를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력배처럼 생긴 곰남자 둘이 덥석 호원을 덮쳤다. 고함을 지를 새도 없이 입부터 틀어막고 명치를 때리고 기절시켰으니 저항을 할 틈은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니 센터의 이 남자의 사무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아직 비몽사몽한 호원에게 싱긋 미소를 짓고선 ‘우리 쪽 가이드로서 일해.’라며 부탁 아닌 명령, 협박의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그쪽 제대로 맺은 센티넬 하나 없을 텐데 우리 쪽 권유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시- 싫다니까요! 난 이제 별로 각인 같은 건 관심 없고...!”
 “흠... 싫다고 해도 이쪽도 내빼긴 어려운 입장인데.”


 이거. 어느 샌가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백화가 성큼성큼 다가와선 호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건 하나의 계약서였다. 호원이 단 한 번도 눈에 본 적이 없는. 이 가문의 가이드로서 센티넬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종이 계약서. 게다가 아래에는 호원의 이름과 본 적도 없는 지장이 찍혀져 있었다. “아, 참고로 이건 그쪽이 찍은 거거든.” 냉큼 호원의 손을 잡아 올리면 정말 엄지손가락에 본 적도 없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절한 사이에 멋대로 찍은 거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쪽..!”
 “경찰도 우리 쪽에 굽신대는 거 잘 알면서.”
 “...윽”
 “나쁜 제안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참고로 멋대로 계약을 파기할 시 벌금 1억이야.”
 “-!!!”


 그 커다란 돈을 어디서 구하라고....! 그러니까 하라는 말이지. 그는 세 번째로 만난 센티넬 영감보다 더 능구렁이 같았다. 한 번 덥석 물어서 놔주지 않으려는 독종!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글썽이는 호원을 즐겁게 내려다보며 백화라는 남자는 크게 웃었다.


 “뭐, 나쁜 제안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협박이잖아-!!!!’


 “게다가 그쪽 워낙 말도 많은 가이드라 다른 센티넬들은 거들떠도 안 봐주는 것 같은데. 다시 예쁨 받을 좋은 기회라고. 본가에 쫓겨나서 이도저도 못한 상황에 단칸방에서 지낸다며? 거기 집값 싸더만. 얼마 안 하던데.”
 “....뒷조사까지 하면서 날 가이드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뭐에요? 그만큼 아는 거면... 내가 이제까지 가이드로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다 알 텐데..”
 “알지 그럼.”


 알기 때문에 더 당신이 필요하단 거야. 훌쩍이는 호원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춘 남자는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례적으로 찾기 힘들다던 가이드 지수 200을 단순하게 뛰어넘어 버린 가이드지 그쪽. 듣자하니 214였던가? 하지만 지수가 높다고 다가 아니지. 단지 계약을 맺기 위했던 것만으로도 앞길이 창창한 센티넬을, 부유하던 센티넬을, 저속하지만 이용가치가 뛰어나던 센티넬을 전부 다 골로 보내버린 가이드. 붙기만 해도 저주가 달라붙는다며 센티넬이 극악적으로 기피하는 대상 1등.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상대를 죽여 버린다던 저주 받은 가이드. 차씨가문의 장남 차호원.”
 “.....”
 
 “그쪽이 꼭 맡아줘야 할 센티넬이 있어.” 고이 계약서를 접어다 호원의 손에 쥐어준 백화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으나 그 웃음이 가식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보다는 조금 더....


 “...그건 그쪽이에요?”
 “뭐? 나? 미쳤어? 난 죽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난 이미 계약된 가이드가 세 마리나 있어.”
 “....”


 완벽하게 가이드를 가축취급 하는구나. 호원은 인상을 콱 찌푸렸다. 그럼 대체 누군데요? 호원의 물음에 백화는 씩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 동생.”
 “....”


 .......?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호원을 내려다보며 백화는 훗, 하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선 다시 벌떡 일어나 긴 다리를 휘적대며 잠시 그 주위를 뱅뱅 돌다가 책상에 대충 걸터앉으면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서가 다가와 잔을 쥐어주었다. 그러곤 값비싸 보이는 양주의 뚜껑을 열어 익숙하게 그 잔을 가득 채워 넣으면 남자는 망설임 없이 쭈욱 양주를 들이키고선 입가에 흐르는 자국을 슥 손등으로 닦아 쿡쿡 웃었다. 붉게 빛나는 남자의 검붉은 눈동자는, 마치 광기에 서려있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아이러니한 일이지. 저주 받았다던 가이드를 내 손으로 직접 동생에게 선물해 준다는 건.” 그치만 이 방법밖엔 없잖아. 잔을 다시 채워주기도 전에 남자는 들고 있던 잔을 바닥으로 확 던져 깨트렸다. 쨍그랑 깨지는 유리조각들이 날아가 하나는 호원의 뺨을 재빠르게 그어냈다. 따가워! 주륵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손바닥으로 감싸며 호원이 작게 앓았다.

 “이렇게 하면 내 손을 쓰지 않고도 녀석이 저주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를 가이드로서 맡기는 이유가.... 동생을 죽이고 싶어선가요...?”

 어째서? 호원의 물음에 그저 씩 웃기만 한 백화는 글쎄. 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적어도 넌 그렇게 만들어 줄 거잖아.”

 ‘......아냐.’

 그럴 생각, 눈곱만큼도 없는데...



*  *  *


 “결국... 와버렸다...”

 덜렁 집주소가 든 종이와 상대 센티넬 얼굴이 찍혀 있는 사진 하나. 그리고 캐리어 하나와 함께 호원은 남자가 시키는 대로 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일단 월급도 제대로 지급되는 것 같고, 하지 않는다고 하면 벌금이 1억이니 발뺌을 할 수나 있을까... ‘제대로 저주하고 와줘!’ 라며 입에 침 하나 바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마치 싸이코패스 같았다. 정말로 저주내린 가이드가 가는 거라고요? 죽을 수도 있다고요? 형제 싸움 좀 살벌하게 하지 마시고요? 제 3자는 뭔 죄냐고요!

 ...라고 아무리 따져봤자 결국 호원은 을의 입장이니 소용이 없다. 결국 짐을 부랴부랴 싸고 남자네 집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의 이름은 주명. 나이는 호원과 같은 23살에 그 형에 그 동생인지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에 떡하니 저택 하나 짓고 사는 듯 했다. 그리고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사진의 얼굴에 호원은 끙 앓았다. 어디 가서 시선 확 끌어질 케이스야 이런 사람들은... 게다가 왼쪽 눈에 두른 안대가 특징이었으니 갑인 백화의 얼굴과 헷갈릴 이유는 없었다. 긴 머리도 아니었고, 곱슬기가 살짝 도는 남자의 까만 흑발도 조금씩 달라 보였다.
 그런데- 순순히 들여 주긴 할까? 딱봐도 수상한 차림새에 이름부터 들으면 질겁한 소문의 저주받은 가이드고. 이제껏의 경험들을 떠올리면 초면에 욕을 얻어 들어도 이상할 리 없는 상황이었다. ‘내 동생 내가 보냈다고 하면 과격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혹시 모르니 들어는 보라며 떠나기 전에 알려준 팁도 있었지만 정말 동네 깡패에 불과한 내용들뿐이었다.

 ..어쩌지. 남자가 알려준 주소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고. 우울함에 한숨만 푹푹 새어 나오지만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힘내자 차호원! 1억은 솔직히 주기 싫고 돈도 없잖아! (..) 이젠 내뺄 기력도 없어!

 “좋아, 빨리 가자-!” 아자아자!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쥔 호원이 확 걸음을 내딛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캐리어의 틈에 끼어 그대로 확 몸이 고꾸라져 엎어졌다. 커헉! 시멘트 바닥에 냅다 얼굴을 박고 엎어진 호원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아.. 뭘 제대로 하려고 하면 항상 이래...ㅠ!’


 “.....거기 뭐하냐?”
 “!”


 악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까지! 수치감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멀리서 멍! 하고 짓는 소리까지 들린 걸 보면 강아지도 있는 모양이었다. 터벅터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커졌다. 그냥 이대로 지나가주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호원이 조금씩 비틀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내민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땅에 그렇게 미련하게 엎어지면 코 깨진다.”
 “..아...”
 “허, 손 아프거든? 빨리 일어나.”
 “아, 감사합니다...”


 착한 사람이다... 부끄럽기는 해도 상대에게서 내밀어진 배려심에 코끝이 찡해졌다. (다른 의미로도 찡해진 것도 있지만.) 급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호원은 거리낌 없이 상대 남자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


 그건 마치 간지러운 정전기처럼 일어났다. 맞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쓰한 온기가 온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 만졌던 차가운 느낌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 느낌은 곧 사라지고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감정이 스며 들어왔다. 상대가 느껴왔던 웅축된 감정들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간 배워왔던 것 그대로 맞잡은 손 너머로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건 아주 당연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대를 진정시키는 마음을 불어 넣었다. 몇 초도 걸리지 않고, 상대도 능숙하게 기운을 받아냈다. 마치 빈잔이 덜렁 있는 듯한 남자의 속은 잔뜩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위험해.’


 어떻게 견뎌온 거지?



 “....그쪽.. 가이드...냐?”
 “.....아.”


 나도 모르게 그만! 급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호원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배려를 받은 상대 남자는 호원이 찾던, 백화가 가이드를 맡아주라던 센티넬이었다. 그는 이 행위가 조금 불쾌했던 모양인지 인상을 콱 찌푸리고 있었다. 생글생글거리며 능글맞게 웃던 형과는 다소 큰 차이를 보였다.


 이렇게 쉽게 찾게 될 줄이야. 사진과 똑같이 번지르르한 얼굴로 서있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주명이었다. 형과는 다르게 조금 밝은 빛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저 얼굴만으로 대면해서 만났더라면 그의 생김새에 중점을 두고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겠지만 호원은 마음이 급했다. 이 남자는, 당장이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는다면 언제 폭발할지 모를 위태로운 사람이야.


 문득 남자가 보자마자 하라던 팁이 떠올랐다. ...그걸 위해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상대의 상태가 이래서야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보기도 어려웠다. 호원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의 양심보단 계약서에 적혀 있던 1억이 더 컸다. 미안해요 주명씨! 그치만 이렇게라도 하면 어차피 가이드로 일할 거, 조금은 안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호원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쪽 멋대로 이러는 거 그만..-”


 덥석 멱살을 잡아다 끌어당긴 주명이란 남자는 무방비하게 호원의 앞으로 끌려왔다. 당황해 벌어진 입술로 호원의 입술이 겹쳤다. 놀란 주명의 붉은 두 눈동자가 번쩍 떠지며 커졌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닌 감정을 공유해 제어하기 위한 농밀한 행위였다. 서로에 대한 마음따윈, 하나도 없어도 뽀뽀도 키스도 섹스도 할 수 있다는 게 우습지.

 ‘이 사람이랑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선 멋대로 키스한 것부터 각인 확정이지만. 쪼오옥 소리가 날정도로 입술을 눌러 붙인 호원은 입술을 파고들어 고여있던 타액을 꿀꺽 삼켰다.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입안을 더듬어 서툴게나마 타액을 흘려보냈으니 간접적 각인 맺기는 성공한 셈이었다. 이렇게 쉬웠다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랑도 진작 해놓을 걸. 돈이란 건 참 애석한 존재였다.


 처음 만난 사이에 5분조차 지나지 않은 상대.
 저주를 뿌려 된다면 죽음으로 몰아달라던 형과 똑 닮은 남동생.
 저주받았다던 가이드인 차호원. 어딘가 위태로운 센티넬 주명.
 그렇게 각인은 맺어졌다.



 제대로 맺어졌어. 알 수 있어. 입술 가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손등으로 눌러 문지르며 호원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나른한 기분도, 기분 좋은 느낌도 들 리가 없지. 떨어진 상태로 조심스레 주명의 동태를 살폈다. 짧았지만 분명 원기는 불어 넣어 줬으니, 조금은 괜찮겠지 싶었다.

 “..이제 괜찮으세-”
 “무슨....”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짓이야-!!!!!!!!!!!???!!!!! 이 정신나간 놈이!!!!!!!!”
 “아악!!!!!”

 뻐억! 떨리던 주먹이 호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괜찮냐고 걱정해야 하는 건 이쪽이었구나! 몰려오는 현기증에 비틀대던 호원은 결국 다시 바닥에 엎어져야만 했다.
 처음으로 맺게 된 센티넬과의 첫만남이었다.










삘받다 쓰니까 오랜만에 만자 넘었다.. (코슥)

정작 주명이랑 만난 장면밖에 없어서.... 나중에 더 쓸 수 있어요....


주명 : 센티넬. 가이드 없음. (강제적으로 호원이랑 맺어진다..) 24년동안 형식적으로 가끔 손만 잡는 가이드만 만나옴. 정신력이 강하다... 무슨 능력인지는 앤오님이... (ㅈㄴ)


백화 : 센터의 젊은 중추 관리원.. 직급이 높다.. 돈도 많다.. 주명이 괴롭힌다.. (분노) 센티넬. 주명일 어떻게든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싶어하지만 제 손을 더럽히긴 싫을 것 같아.. (..) 그 말많던 가이드 호원을 배치시킨다. 1억으로 협박한다..


호원 : 저주받은 가이드. 센티넬 싫어한다. 그치만 1억 때문에 강제로 주명이랑 각인을 맺는다. 의외로 가이드 수치가 높다. (평균 100~150인데 호원은 214)


갑자기 센티넬버스가 땡겨서.. ㅠ..... 멋대로 설정 끄집어 캐붕시켜서 죄송합니다.....























'차호원 > 여러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 (미완)  (0) 2017.11.18
비밀  (0) 2017.06.04
> 熱  (0) 2017.05.17
호구원이와트 (1~4)  (0) 2017.05.17
요괴AU  (0) 2017.05.17

인터뷰

2017.03.05



*아이돌AU



 [이번 3월 영화관에서 상영될 예정인 ‘너를 찾고 있어’라는 영화에 주연을 맡은 배우들 중에서 한창 뜨고 있는 신인 아이돌 ‘게이지’가 신인 배우로 새롭게 재탄생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 게스트로 모셔봤는데요. 주명 씨와 차호원 씨입니다~!]


 커다란 촬영장 안에 마련된 두 자리의 좌석엔 호원과 주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을 인터뷰 하러 온 기자와 촬영진들 사이엔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들이 두 사람을 비췄다. 모든 사람들이 단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장소.


 신인 아이돌로 막 뛰어든 지금, 무대에서 막노동을 해야 할 시기에 운이 좋게 배우로도 뛰어들 수 있었다. 그것도 주연으로! 자연스럽게 인지도는 물 흐르듯 흘러 들어왔고 덕분에 인기 연예인들만 초청한다던 인터뷰 프로그램에도 호원과 주명이 초대되었다.

 호원은 감격했다. 이래야 연예인이 된 맛을 느끼지! 줄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 주명이 옆에서 혀를 끌끌 찼지만, 아무렴 어때. 좋아하던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게 된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호원은 미리 인터뷰에 건네질 질문들을 미리 뽑아다 정리하고, 밤이 샐 동안 내내 연습하고 또 연습. 실수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인터뷰가 시작할 때까지 두근대는 가슴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드디어 방송 시작. 기자는 간단하게 대사를 훑어보다가 활짝 웃으며 호원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좋아, 영화 질문지에 관해서라면 간단하게....!


 “2인 아이돌인 팀 게이지는 유난히 스캔들로 유명한데요. 호원 씨와 주명 씨가 교제하고 있다는 루머 아닌 진실 이야기! 사실인가요?”
 
 ‘아니, 영화 관련은~!?!?!?’


 그래! 솔직히 안 할 수가 없겠지요~! 딩, 울리는 머리가 흔들렸다. 속으론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아이돌로 데뷔하고 조금 인지도가 올라가게 되면 유명 프로그램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여러 곳에 초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붙는 질문. [주명군과 사귀는 사인가요?] [스캔들 상대가 대부분 주명씨던데 이정도면 빼박이죠?] [정식으로 교제하는 상대가 같은 팀으로 일하고 있는 주명] [연인이 주명] [주명군이...]


 ‘그것도 전~부 모든 인터뷰에! 그것도 매번 첫 질문!’


 환장하겠네! 몇 번이나 아니라고 대답했으면 기사도 제대로 쓰고 사람을 조사할 거면 옛날 기사들도 제대로 알아봐달란 말이야! 이거 고의지. 절대 고의지. 뭣보다 항상 이런 질문은 나한테만 먼저 해!
 
 같은 그룹이라서 그런지 엮이는 일이 많은 건가? 하지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것도 주명 저것도 주명 요것도 주명 다 주명! ! ! ! 완벽한 징크스에 걸린 게 틀림이 없어.


 ‘..그것뿐만이 아냐. 제일 곤란한 건 대답이지...!’


 매번 똑같이 들어오는 첫 질문. 그리고 한결같은 대답의 [아니요]에서 호원은 옆에 있는 파트너에게 귀신같은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주명에게! 


 ‘넌 항상 덧붙이는 대답이 문제야.’ 겨우 분을 삭힌 주명이 인터뷰가 끝나면 머리를 쥐어박으며 소리를 높였다. 머릿속이 울리는 후두부를 손으로 감싸며 호원은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사귀지도 않는 상대인 아이돌 그룹 파트너에게 그럼 ‘네, 저희는 교제하는 사입니다!’라고 말할 순 없잖아!


 [에이~! 사귈 리가 없잖아요. 아하하, 누가 그런 루머를 퍼뜨렸는지 궁금할 정도네요. 얘는 저 싫어하는 걸요!] > 맞는다.
 [사, 사귀지 않아요! 전혀-! 절대 아녜요! 사귈 리가 없잖아요! 이런 녀석이랑! 누- 누가..!] > 맞는다.
 [사귀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캔들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네요. 된다면 다른 분이랑 나도 이상하지 않을 텐..] > 맞는다.
 [오해입니다. 누구랑 교제라니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고, 저희 둘도 서로와 함께 교제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 맞는다.
 [절!!!!!!!!대!!!!아냐!!!!!!!!!!!!!!!!] > 두 번 맞는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도 끝나면 분명히 맞겠지....’ 하하, 멋쩍게 웃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에 대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굴리고 굴렸다.


 ‘사실, 별로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한다. 스캔들에 주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같은 파트너이자 남자 사이끼리 이런 기분이 든다는 건 기묘한 일이다. 혼란도 오고, 믿을 수도 없었고... 하지만 어쩌랴, 이상하리 마음이 가는 걸 멈출 수가 없는데.
 그치만 본마음 끌리는 대로 그 스캔들이 사실이라고, 아니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이 연예계 판이 어떻게 될지 멍청한 호원도 잘 알고 있다. 일반인도 매몰차게 당할 게 뻔한 이 시대에,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이 상대 파트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 또한 어떻게 될까. 주명을 위해서라도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이런 마음은 꼭꼭 눌러두고. 호원이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매 인터뷰마다 어설프게, 조금은 진지하게, 화도 내보고, 가지각색의 여러 방법을 쓰면서 아니라고 부정해왔는데.


 전 부 맞 고 혼 났 어 !


 이렇게까지 되면 부정하면 맞는다. 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정도면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부정하기 보다는 살고 싶어서 여러 방법을 써서 부정하게 된다...


 이번 인터뷰에는 나오지 않길 바랐것만, 징크스마냥 나오게 되네. 기자는 눈에 불을 밝히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 주명임을 알고 있다. 어떻게 대답할지 기다리는 거겠지, 이제껏 호원이 대답한 것들은 모두 오답으로 쥐어 박혔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카메라는 이미 정면으로 호원과 주명을 찍고 있었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던 호원은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선 번쩍 눈을 떴다.


 “그... 건 말이죠!”


 냉큼 옆에 있던 주명의 손을 텁, 잡으며 호원이 눈을 반짝였다. ㅊ..차호원? 주명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냉큼 잡은 손을 올리며 호원이 입을 열었다.


 부정도 안 돼, 그렇다고 수긍도 하면 안 돼. 그럼 나오는 답은 하나.


 “노-코멘트. 입니다!”
 “....”
 “....”
 “에헤헤.”


 나 잘했지? 혼자서 멍청하게 웃는 동안 내내 촬영장 내부에서 싸늘한 정적이 울렸다.




*  *  *




 “그딴식으로 대답하면 빼박 스캔들 인정이잖아 멍청아!”
 “아파!!!!”


 이것도 정답 아냐?! 나보고 뭐 어쩌라고-!

 인터뷰가 공개된 날, 새벽까지 내내 실시간 검색어 키워드에 두 남자의 이름이 종일 검색돼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차호원 > 너를 찾고있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찾] HAPPY ENDING?  (0) 2017.05.17

[너찾] HAPPY ENDING?



*  *  *

2017.03.01





 당신은 기억을 돌려받았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서로 노력한 덕분이겠지.
 눈앞에 상대, 아니 연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간지러운, 또는 슬픈듯한 느낌에 왜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넌, 결국 나 때문에 죽었던 거구나.”
 “..너보다 내가 멍청했네, 본인이 죽은 것도 모를 정도로..”


 그치만 네가 살았으니까, 그걸로 됐어. 라며 가벼운 목소리로 네가 말했다. 맞아 넌 멍청이야. 라고 네 속을 건드려도 그저 편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붉게 빛나던 눈동자가 인자해진다. 넌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틈만 생기면 곧바로 때리고 화도 내면서, 왜 이럴 땐 아무렇지도 않게 웃기만 해? 바보야? 화도 못 내? 나보다 멍청이야? 연인에게 왔을 분노가 자신에게 몰려 오는 느낌이었다. 이유도 없이 화가 나고 이유도 없이 슬퍼서 이유도 없이 죄악감이 몰려왔다.

 결국 넌 나 때문에. 돌려받은 뚜렷한 기억 속엔 눈앞에 피로 덮인 꽃잎들 속에 파묻힌 명아가 있었다. 아름답던 붉은 눈동자는 굳게 감겨 보이지 않았다. 오직, 네 몸에서 나온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수많은 붉고 붉은 피가 너의 몸과 내 몸을 적셨다.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이렇게 다시 한 번 더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잃어버렸어, 너 때문에. 멀리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입가를 비죽대며 웃었다. 그와 반대로 이질적인 눈물 또한 소년의 뺨에 흘러 내렸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살인마. 
 


 “명아, 난....!”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


 신께서, 끝없이 사랑한 너희들에게 단 한 번밖에 없을 기회를 안겨주셨어. 스피커 너머로 레이첼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상대를 잊어버려도 다시 반할 수밖에 없던 너에게, 신께선 자비를 안겨주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쿡쿡 박혀온다. 온 몸에 느릿하게 전율이 울려 퍼졌다. 팔찌를 찬 손목이 욱신욱신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해 보이던 펜션 안은 어느새 새하얗게, 주변에 자리를 채우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너마저도 흐릿한 모습이었다. 안 돼 명아.. 가지 마. 불안해하는 바보 같은 얼굴을 보던 명아는 뭐가 그리 우스웠던 모양인지 천천히 입 꼬리를 올렸다. 그는 마지막까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댔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작게 모인 입모양은


 차, 호 원
 나중 에


 .


 뭐라고?


 [이제 너만 남았구나.] 어딘가 따뜻한 목소리가 닿았다. 그 손이 뺨, 귀, 목, 허리, 다리 군데군데 사심한 곳까지 나를 감쌌다. 마치 그 분은 따뜻한 봄 같았어. 눈앞에 보이진 않았지만 온 몸을 감싸며 안아준 그 분의 손은 컸고 목소리는 인자했다. 그는 마치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 마냥 조심스레 나를 안아들고선 가만히 살피며 다시 말했다. [너는 다시 정에 빠져 네 정인을 구했구나. 그런데도 어찌 그리 서글프게 우는 게냐.] 그 말 때문에 울고 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하하, 어떻게 마지막까지 울보일 수가 있을까.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은 기이하게도 뺨을 타고 내리는 것 대신 공중에 떠 동그랗게 둥둥 떠다녔다. 마치 마법처럼, 투영하게 빛나던 물방울 너머론 나와 명아의 얼굴이 비췄다. 그리운 네 얼굴에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나 때문에 명아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번 일은]


 퉁퉁 벌겋게 부어 자국이 남은 목을 쓸어내리던 그 분은 말했다. [이번 일은 네게 거대한 벌이 되겠구나.] 단 한 번의 손길 덕분에 붉게 남았던 자국이 깔끔하게 사라져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네 얼굴을 떠올렸어.



*  *  *



 “-차호원!!”
 “~?!”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가에 지잉- 울렸다. 아파! 놀라 덥석 귀를 틀어막으려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나를 붙잡으려 뛰어들려던 네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너 또한, 닿지 않던 내 손목을 붙들고 있었어. 확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하얀 가운을 둘러 입고 서있던 것과는 달리 어두운 검은색의 와이셔츠를 입은 네가 눈앞에 있었다.

 명, 튀어나오려던 네 이름을 입술을 꽉 물며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네 이름을 불렀다.

 “...주명아!”
 “너 멍청하게 뭐하려던 거야! 큰일 날 뻔 했잖아!”
 “아악, 아파!”

 뻑,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 박혔다. 찌릿하게 울리는 고통에 머리를 싸매며 작게 앓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흘러 나왔지만, 마주 편에 헉헉 숨을 몰아쉬던 주명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와 크게 불평을 늘어뜨릴 수도 없었다. 질겁한 네 얼굴이 평소보다도 하얗게 질려 놀란 듯 보였기 때문이다.
 너 진짜! 부들부들 주먹을 쥔 주명의 손이 떨렸다. 냉큼 내 얼굴을 쥐어 잡으며 (아, 아아 것보다 아파.. 아파팟) 확 돌려 재꼈다. 주명이 가리킨 방향은 차들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던 도로변이었다. 마주 편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신호등. 일직선으로 쭉 진열된 횡단보도.

 아, 이곳은.
 너를 잃었던 곳이야.

 “진짜, 도중에 네가 갑자기 멈춰서 다행이지. 너 거기 한 발자국만 내딛었으면 큰일 날 뻔 했거든!?”

 한 발자국. 횡단보도로 내딛기 바로 전 걸음이 멈췄던 모양. 그런데, 도중에 멈췄다고? 생소한 이야기였다. 아는 것과는 다른 전개였다.
 분명 그것을 쫓고 횡단보도로 뛰쳐 들었다. 빨간 신호등이 자신을 반겼던 것도 기억에 선명했다. 차에 치이기 직전, 눈앞을 쫓던 게 없었다는 결 겨우 떠올렸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앞에 누워있는 너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널 보았어.’

 충격에 백지처럼 기억을 잃었던 나와, 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의사가 되어 나타난 너를. 지쳐 보이는 붉은 빛 눈동자와 하얀색 가운이 유난히 눈에 띄었었다. 아마 나를 돕느라 조금 지쳐 있던 걸 테지.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기억을 찾기 위해 너와 함께 있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되찾았다. 내가 너를 죽였다는 것도 함께.

 ...그리고 다시 돌아왔고
신은 우리들에게 기회를 안겨다 주었다.

 멍! 옆에서 바짓단을 물며 질질 끄는 돌식이 큰 소리로 짖었다. 옆에 있었구나. 멍하니 돌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랬다. 그것을 바라보던 주명은 한숨을 푹 쉬고 탈탈 머리를 털어내더니 이내 몸을 숙여 돌식의 목에 목줄을 단단히 묶었다. 도중에 풀어져 주명에게 맡겼던 파란색 목줄이었다.
 나 참, 이게 뭐라고. 푹 한숨을 내쉬는 주명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돌았다. 그는 목줄 끝을 놓지 않기 위해 꽉 쥐어낸 다음 돌식의 털을 쓰다듬은 다음에 벌떡 일어났다. 야 차호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눈앞에 그가 거뜬한 모습으로 있다는 게 믿기가 어려웠다.

 카민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다. 살짝 당황한 사이 눈앞에 손가락이 불쑥 다가왔다.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주명이 딱밤을 먹였다. -아파! 벌겋게 부어 오른 이마를 감싸며 헉, 숨을 들이켰다.

 “뭐, 뭐하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멍청이처럼 뛰어들려던 이유가 뭐야?”
 “-그, 그건...”
 “아무튼 사람 마음 멋대로 들쑤시고 다니지 좀 마, 알았어?”
 
 -응.... 힘없이 수긍하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시 푹 한숨을 내쉰 주명은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너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손길.

 “돌아가자.”

 집으로. 그 한 마디가 얼마나 크게 다가왔던지. 뭉클한 가슴이 찌잉 울리면서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네가 살아있다는 게 느껴졌다. 빨리 안 오면 두고 간다. 냉큼 돌식과 함께 등을 돌려 되돌아가는 주명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몸은 자동적으로 둘의 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래, 당신은 시간을 거슬러 사고가 나기 직전으로 돌아갔다. 왜냐고 묻는 연인에게 위험한 일이 벌어질 뻔 했다 말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니라 변명하며 몸을 피했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은 나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어찌 되었든 눈앞에 나타난 연인과 다시 사랑하여 기억의 단편을 모으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준다고. 나는 다시 한 번 주명과 사랑에 빠지고 기억의 단편을 모았다. 기억을 찾았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와 너를 구했다. 너는 여전히 내 옆에서 살아있다.

 그걸로 끝
 ...끝?

 일
 리가 없

 툭! 데구르르르. 공 하나가 발끝을 지나가자 온 몸에 찬물을 뒤집어씌운 것 마냥 차가워졌다. 공은 도로변으로 굴러가지 않고 인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뒤를 어린 소년들이 뒤쫓았다. 차에게 뛰어들기 직전 보았던 제 얼굴과 몹시 흡사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여전히 네 머릿속에 있는 거잖아.

 [이번 일은 네게 거대한 벌이 되겠구나.] 신은 그리 말했다. 제 손으로 직접 목을 졸라 남겼던 자국을 안타까운 시선을 내려다보던 신은, 손짓 한 번으로 자국을 깔끔하게 없애며 나머지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정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 네가 기억할 게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나는 기억하고 있어.

 어떤 상황이 닥쳐 날 너와 나를 바꾸었다고 한들, 내가 너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소름끼치는 사실 하나가 양 날의 화살이 되어 가슴을 꿰뚫었다. 죄악감에 흠칫흠칫 몸이 떨리고, 흐르는 눈물은 시뻘건 봄꽃이 되어, 견딜 수 없는 벌이 된다.
네가 죽였어. 도로변 위엔 더 이상 한 명의 소년이 서있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새하얀 머리카락과 새하얀 옷과 피부를 가진 연인이 덩그러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빨리 찾아와 너 자신을 죽여 버리라고, 그렇게 손짓하는 끔찍한 악몽이 다시 한 번 더 시작된다. 그것이 나의 벌.

 “차호원.”
 “!”
 “안 오고 뭐해, 진짜 두고 가는 수가 있다?”
 “....아, 아아.. 응. 미안.”

 곧 갈게.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연인과 강아지를 향해 시야를 펼쳤다. 까만 머리칼에 까만 계열의 복장, 마치 저승사자마냥 어두운 차림새의 그지만 저와는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치만 살아서 다행이야. 꾸역꾸역 튀어 나오려는 목소리를 눌러 삼키며 푹 고개를 숙였다. 네 피로 젖었던 손가락 사이를 매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명아. 다신 부르지 못할 네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박으며 입을 열었다.

 “주명아”



*  *  *






 나는 기억하고 있어.


 “차라리 원망하고 화내고, 미워하지.”


 그렇게라도 했으면 덜 생각났을 지도 모르잖아. 난 뭐든지 도망쳐버리는 겁쟁이니까, 네가 그렇게라도 날 싫어하고 미워하게 됐으면 아무 말 않고 피해버릴 수 있었을 텐데. 네가 그렇게 웃어버리고 화도 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으면 나 또한 너를 피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잖아.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고맙다고도 말하고 싶었어.”
 “제대로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그 기회를 주지도 않고 떠날 수가 있어? 반대로 내가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낸다고 한들, 상대에게 닿지는 않았다. 그저 온통 하얀 페인트가 범벅이 된 연인은 붉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정이 담겨있나, 한이 담겨있나, 아니면 그 무엇도 담겨있지 않은 무인가?


 “나를 미워해줘.” 똑, 똑 천장 위로 물방울마냥 파아란 꽃잎이 휘날렸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다. 발목 위까지 채워진 투영한 물가 사이로 내게 다가오는 꽃다발이 있었다. 하늘에 휘날리는 꽃잎과 똑같은 꽃. 파란 꽃잎이 머리에, 어깨에, 얼굴에, 다리에, 온 몸에 닿아 떨어졌다. 흘러가던 꽃다발을 손 안에 안아 올렸다. 잔잔한 꽃의 향이 콧등을 간질였다.

 아름다운 꽃은 나를 반기며 웃고, 나는 너를 보며 울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널 평생 잊을 수 없을 텐데.”


 너를 잊을 수 없어. 꽃을 품에 끌어안으면 축축하게 젖은 꽃다발이 몸을 가득 적셨다. 흐르는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질 때마다 빨간 페인트물로 번져 흘렀다.


 이것은 악몽이다.


 “명아....” 네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 무거운 다리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너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돌아오지 않을 네 이름을 입안에 굴리며, 저 멀리 커다란 클락션 소리를 귀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이건 악몽.

 나의 벌.
















'차호원 > 너를 찾고있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0) 2017.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