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호원/여러 AU 2017. 5. 17. 22:55

센티넬버스 1

2017.03.12



 첫 번째 각인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옆집에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였다.


 “신난다! 원이 네가 내 가이드야?”
 “...? 으, 응. 그런가 봐!”
 “아싸! 잘 부탁해!”


 이제 계속 만나서 놀 수 있겠다! 잔뜩 신이 난 친구 기섭이 호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작고 앙증맞은 손은 아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내밀어줬다는 사실만이 기뻐서 기섭의 손을 잡으며 실실 웃었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선택된 센티넬이나 선택받은 가이드인들 겨우 7살 남짓한 아가들이 뭘 알겠는가.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여겨지는 센티넬들은 세계적으로 다양한 능력들을 쥐고 있고, 그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 다양한 지배력들을 쥐고 있다. 하지만 신에게 사랑받은 몸이라고 한들 인간이 그 능력을 전부 다 제어할 수는 없는 법. 혼자서 그 능력을 다스리다간 언젠가 머리가 미쳐버려 그대로 죽어버린다고 한다. 홀로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외로움쟁이 센티넬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종족을 만들었다. 능력은 별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유일하게 센티넬의 몸을 제어시킬 수 있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라는 종족이었다.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흔하게 태어나지 않는 종족들이지만 이들은 유전적으로 대를 잇고 태어나거나 이따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태어나기도 한다. 각자마다의 수치도 구분되어 있고 높은 자들은 그만큼 수치가 높은 상대를 고르기도 한다. 골라야 하는 이유는 간단. 센티넬이 상대의 가이드와 정확한 각인을 맺어야 능력에 좀먹히지 않고 오랫동안 부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각자의 능력이 발화하면 센터에 등록해 때로는 일반인처럼, 때로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역할로 각자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센티넬 가문이라면 센터에 배치되어 있는 높은 수치를 가지고 있는 가이드를 돈을 쥐어 직접 사들이거나 가문대 가문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호원과 기섭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 쉬이 입을 담아 말할 수 없는 명문 재벌 집 가문은 아니었지만 전통적으로 가이드를 배출해내고 있는 차씨 가문은 조금씩 센터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고, 그런 호원이 처음으로 발탁된 상대 센티넬인 기섭네 가문은 정부축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중축의 센티넬 가문이었다. 무엇보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고이 자란 기섭이 상대로 호원을 선택했으니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날은 없었을 거라며 호원의 할아버지는 말했다.


 “우리 축구하러 가자!”
 “응!”


 복잡한 센티넬과 가이드의 세계였지만 정작 단짝인 두 남자아이는 서로 놀기 바쁘다며 어른들의 이야기는 흘겨듣고 공을 들고 나가기 바빴다.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무슨 상관인가? 둘은 각인을 짓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고, 그런 우스운 관계보단 친구라는 사이가 더 중요했다.
 ‘넌 장차 우리 가문을 지탱할 가이드다 원아.’ 라고 말하던 할아버지의 잔소리도 싹 잊어버렸다. 호원은 가벼이 생각하며 공을 든 기섭의 뒤를 따랐다. 가이드는 계약 파기 전까지 무슨 일이든 센티넬의 곁을 맴돌아 지켜야 한다. 라는 교육식의 말 같은 건 금방 백지화가 되어버렸다. 할아버지의 맹렬한 가이드 교육은 속수무책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안일한 생각에 벌을 받은 것이다.


 “....섭아..?”


 툭! 데구르르. 축구공은 도로변에서 굴로 호원의 발틈에 굴러왔다. 멍하니 부른 호원의 부름에도 기섭은 침묵을 유지한 채 차가운 시체로 남아 도로 위에 누워 있었다. 벌겋게 물든 아이의 몸이 마치 인형 같았다. 한 번 떨어트렸다는 이유로 와장창 깨져버린, 어머니가 아끼시던 유리 인형.
 ..아, 설마? 그제야 허겁지겁 축 늘어진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처음으로 센티넬을 위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였다. 할아버지에게 교육받은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며 힘을 불어넣었다. 손기에 느껴질 따뜻한 온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책에 실려 있는 따뜻한 느낌이 돈다는 것과는 달리 손에 감싸진 기섭의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고, 또 축축했다.
 
 그건 저주의 시작이었다.



*  *  *



 제대로 각인이 되지 않은 미각인 상태라고 해도, 각인을 맺기로 한 상태에서 곧바로 일어나버린 사고는 세간의 관심이 꽂혀버렸다. 우연적인 뺑소니 사고일 뿐인데도 기자들은 가이드의 악영향이라며 오보를 냈고, 호원을 저격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단 7살, 가이드라는 이유로 친구를 눈앞에서 잃은 충격을 고쳐낼 새도 없이 수많은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은 건 지금도 호원에게 있어 트라우마로 남았다. 불운은 그렇게 시작됐다.
 겨우 물이 오르던 차씨 가문의 가이드들은 센티넬에게 저주를 불러온다며 직접 돈으로 사들이는 센티네들이 기피 대상 1위로 낙인되어 버렸다. 할아버지로선 애통한 일이었다. 그 탓에 다음에 맺으려던 센티넬들의 후보들이 쏙쏙 빠져나가고 몇 년 동안이나 맺으려던 약조가 깨져 버렸으니. 결국 나이 15살, 까이고 까이고를 반복하며 호원은 두 번째 센티넬을 맞이했다.


 “아, 그쪽이 저주내린 가이드구나!”
 “...차호원인데요....”
 
 나이 32살 여성과 나이 15살 소년. 누가 봐도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땅꼬맹이를 보며 30대 센티넬 여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본 그녀는 양 품 안에 잘생긴 가이드 두 남자를 껴안으며 신기한 듯 호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명문있는 센티넬 가문의 셋째 자녀인 그녀는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가이드 수집을 하던 중에 이리저리 쫓겨나던 호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여성은 거부감 없이 가이드인 호원을 계약직으로 맺겠다며 불러냈고, 이번에 둘도없을 기회라며 할아버지는 호원을 냉큼 보냈다. 결국 학교가 파하기도 전에 책가방을 매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온 호원에겐 거부권은 없었다.


 뭐야, 소문이랑 달리 그냥 꼬맹이구만. 그녀는 호원의 모습에 조금 실망한 듯 보였다. 쭈뼛거리며 다가온 소년을 향해 손을 휘적대며 입을 열며 말했다.


 “방은 집사들이 안내해줄 테니까 거기에서 쉬고 있으렴.”
 “아, 아! 네... 그, 근데 저... 각인은...?”
 “갓 성인도 안 된 꼬맹이랑? 꼬마야, 각인 맺는 법은 알고?”


 꺄르륵 웃으며 되묻는 그녀의 말에 호원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야...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단 한 짝밖에 맺지 못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각인 맺기는 ‘타액 공유’였다. 평생을 함께 할 사이라고 정한 상대나 보통의 각인 관계는 일반적인 성관계를 통해 각인의 매듭을 짓지만 이를 선호하지 않는 자들은 타액이 섞인 잔을 교환하거나 입맞춤으로 통일 짓고는 한다. 다만 제대로 된 성관계로 맺어진 각인이 아닐 경우엔 완벽하게 센티넬과 가이드의 상호관계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애초에 가이드의 역할은 센티넬의 폭주를 맞기 위한 ‘제어제’ 역할이니 제어하기 위해선 접촉을 목적을 기반해야 한다. 호원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여성은 옆에 안고 있던 남성의 뺨을 쓰다듬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도 된다면 제대로 각인을 맺고 싶지만~ 이 오빠들도 있어서 말야. 한 명이랑만 관계를 맺는 건 조금 어렵지? 특히 너 같은 어린 애랑은.”
 “네?! 그, 그럼 각인은 어떻게...!”
 “나중에 각인 주사 따로 보낼 테니까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 주사라면...”


 새로 개발된 각인 맺기용 주사기는 호원도 얼핏 내용만 들어보았다. 원래는 단 한 짝밖에는 맺을 수 없는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다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용으로 새롭게 개발된 것이었다. 상대 센티넬의 혈액과 특별한 용액이 주입된 주사기를 맞으면 본래 각인된 센티넬이 있다고 한들, 또 하나의 다른 센티넬을 상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일시적이지만 몸으로 관계를 맺은 센티넬처럼 같은 효과용 제어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비한 주사기.


 “...하지만, 가이드가 그 주사를 맞으면 그만큼 부작용으로 고통스럽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싫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내가 널 얼마로 사들였는데. 게다가 너, 너 때문에 센티넬도 죽었었다면서. 그거 다 듣고도 감안하고 사온 거야. 그 정도 값은 해줘야 할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사납게 쏘아 붙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이 호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그녀와의 다음 대화는 없었다. 집사로 보이는 사람의 안내를 따라 쭉 방 안에 대기를 해야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의 센티넬 기운이 흐르는 피가 섞인 주사기가 덜렁 준비해졌다. 여기에 사는 다른 가이드들도 나랑 같은 주사를 맞고 있을까? 여러 의문과 함께 호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팔에다 주사기를 맞았다.
 그 날은 종일 온 몸에 화끈화끈 열이 나 새벽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끙끙 앓아야만 했다.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할 때까지 흐르고 또 흘렸다.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호원의 애석함을 대신 전했다. 사지가 다 뜯겨나갈 것 같았고, 뜨겁고 뜨거워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이라도 각인이 된 거니까. 더 이상 저주저주 놀림받을 이유도 없을 테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끊이질 않는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참았고, 호원은 어서 빨리 그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호원을 찾는 일은 단 한 번도 없게 되어버렸다. 호원이 각인 주사를 틈틈이 받기 시작한 지 한 달 채 넘어간 일이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스트 가이드들을 품에 끌어안고 드라이브를 하던 그녀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오토바이와 충돌해 그대로 즉사해버렸다.

 그렇게 두 번째 가이드를 잃어버린 채, 몸은 덜렁 부작용만 남은 채로 호원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  *  *



 세 번째 센티넬은 온 얼굴에 기분 나쁜 주름이 진 70대 할아버지였다. 당시 호원의 나이는 19살. 그는 다시 학교에서 야간 자율을 하기도 전에 덜렁 가방만 메고 웬 삐까뻔쩍한 차를 타고 끌려가야만 했다.


 “차씨 영감이 자네를 소개해주더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네. 치수는 무려 200을 뛰어넘는 상급 가이드가 안 좋은 일이 겹쳐 짝을 못 찾았다고.”
 “....하하, 네.... 부득이하게도요...”
 “딱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말게. 특별히 내가 자네를 거둬주지. 굳이 다른 센티넬을 찾으려 헤맬 필요도 없지.”


 진작 얘기만 해줬으면 미리 만났을 터인데. 아쉬운 듯 쯧쯧 혀를 차는 영감의 모습에 호원의 몸은 점점 더 작아졌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쉽사리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중소 기업 몇 개를 운영하고 있는 나름의 이름 알린 기업의 회장님이었다. 젊었을 적 센터의 탑에 들어갈 정도로 능력을 거뜬히 발휘한 센티넬이라고도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가이드 모두가 이 남자를 꺼릴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배우는 가이드 교육에 나온 영감의 이름에 할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해왔으니 잊을 리 없었다. 이런 별종은 눈이 마주치지도 말아야 한다며.


 ‘그렇게 말했는데... 나한테 말도 없이 이 할아버지를 붙여준 걸 보면....’


 “각인식은 될수록 빨리 진행하는 게 좋겠지. 집 쪽에 동의도 얻었으니 오늘은 우리 쪽 집에 머물러 가게나.”
 “네? 그, 그치만 따로 연락은...!”
 “괜찮대도.”


 앞으로 계속 함께 할 사인데 뭐가 어렵다고. 금이빨을 씩 드러내며 웃는 꼴이 호원의 눈에는 메스껍게 느껴졌다. 그는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며 호원의 의사도 없이 덥석 손을 잡고선 주름진 손을 그 위에 덮었다. 느릿하게 조물딱 거리는 손길에 호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손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호원을 내다보는 끈적한 시선이 역겨웠다. 귓가에는 벌써부터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젓던 꺼내던 말이 울린 듯 했다.


 그 영감은 틀렸어! 쯧... 제 나이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지. 남색을 밝히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지...


 이제껏 가이드와 맺은 숫자만 해도 열댓이 넘지만 그의 성적 희롱에 질려 나가떨어진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가이드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 계약을 해지하고 나올 수 없었다고. 각인을 풀자고 말한 가이드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며 그들의 꼬리도 찾기 힘들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분명 나가겠다고 하니 다른 센티넬에게 보낼 바에야 아예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넌 절대 그런 놈들에게 꼬이지 마라 원아. 라며 서툰 손길로 어린 손자를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기억은 아직도 선선했다.

 그랬는데,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가 정작 호원과는 아무 말도 없이 먼저 선동해서 이 영감에게 가이드로서 소개시켰다. 돌아오는 배신감과 죄악감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팔아졌다고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호원은 튀어 나오려던 눈물을 꾹 삼켜냈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저주내린 가이드라고 불릴 정도면 이젠 별로 각인같은 건 맺지 않아도 되잖아. 각인, 그게 뭐라고... 가문의 영광, 그게 다 뭐라고......


 ‘차라리 이렇게 팔려갈 거라면......’


 “20분 내로 도착할 테니 눈 좀 붙여두게. 이야기는 그때 가서 천천히...”
 “...............텐데.”
 “응? 방금 뭐라고...”


 차라리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건 마치 반갑게 들리던 저주의 재시작이었다. 운전석에서 핸들을 돌리던 기사의 숨소리가 커졌다. -빠앙! 클락션 소리와 함께 호원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던 능구렁이 영감은 눈앞에서 바로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차가 장난감처럼 데굴데굴 도로변을 굴러 전봇대에 꽂혔다. 안전벨트에 단단히 묶인 호원은 그대로 차 안에서 기절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호원뿐이었다. 차의 타이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니면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모두가 수군거리던 말 대로 가이드의 저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던 건지 차사고는 다시 한 번 발생했다. 밖으로 튕겨져 나간 영감은 그대로 죽어버렸고 운전석에 자리 잡던 기사님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오직 호원만. 그는 살아남았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운도 지지리 나쁘면서 이럴 때면 용하게 살아남는다. 눈을 떴을 때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다보던 할아버지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호원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젠 다신, 각인 같은 건 맺지 않을래요. 차라리 정말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고인 눈물이 또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왜 항상 내가 맺으려던 짝들은 모두 죽어버리는 거지.



*  *  *



 인정하자.
 차호원은 저주내린 가이드다!


 애초부터 누굴 센티넬로 받아들여 짝을 만들 생각 따윈 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짝을 찾아보고 세 번째 센티넬까지 관계를 맺을 뻔 했지만 정작 성사된 건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들을 전부 죽음으로 몰아버렸다. 더 이상 호원을 찾는 센티넬은 없었다. 제 아무리 수치가 높은 뛰어난 가이드라고 한들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이들을 찾아보겠다며 손을 떼어냈다.


 이 가문에 먹칠하는 미련한 놈 같으니. 어릴 적에 그렇게나 자상하던 할아버지도 이젠 호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원의 뒤를 잇는 두 동생 다 호원보다는 수치는 낮아도 뛰어난 가이드로 태어난 것이다. 호민과 호천은 나름 이름 날린 센티넬과 계약을 맺어 거덜나려던 가문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두 동생들은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정작 장남이라는 놈이 저래서야 써?! 이젠 얼굴만 볼 때마다 으르렁 이를 가는 통에 호원은 쉽사리 본가로 돌아가기도 힘들었다. 결국 대학을 들어가 기숙사에 쭉 지내고 취직을 하고 나선 부랴부랴 단칸방을 구해 집을 나와야만 했다.


 간호사로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 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매일같이 할아버지와 1 : 1로 가이드 교육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고 제대로 놀지 못했었다. 가이드로서 일했다면 분명 24시간 내내 센티넬의 일에 따라 센터 일을 맡아왔을 것이다. 그래도 그 편이 더 살기는 쉬웠을 걸. 적어도 막노동은 아니라며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지만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이대로 만족해. 간호사로서 환자들과 웃으며 지내고, 버거워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어떻게 보면 센티넬을 위해 가이드로서 일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배시시 웃으며 호원은 다시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걸로 만족한다고.


 ...만족하는데.....



 “...그러니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
 “응- 안 돼^^”


 단호하게 호원의 말을 잘라낸 흑발의 남성은 말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양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난 분명히 만족한다고 했는데. 전과는 다른 의미로 땀을 뻘뻘 흘리던 호원은 마치 조직 폭력배처럼 커다란 등치의 두 남자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호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센티넬 센터의 중앙지점에 위치한 이 남자 전용 사무실이었다. 남자의 비싸 보이는 테이블 위엔 값비싼 양주와 잔 몇 개. 그리고 남자의 현직을 알리는 이름표가 부착되어 있었다.


 [백화 이사] 제 아무리 무지한 호원이라고 한들 이 남자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센터의 중추를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그는 이미 수십 명의 센티넬들의 몫을 단 한 명으로 거뜬하게 수행하고 있는 요원이라고 들었다. 센터에서 일하는 것뿐만이 아닌 이미 기업의 몇 개를 꿀떡 삼켜 회사의 주주로서도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뒷배경도 장난이 아니겠지. 이 이야기를 들은 건 호원이 중고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귀가 닳도록 얘기해준 것이었으니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남자의 위치는 배로 더 커졌을 것이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곱슬의 긴 흑발 머리는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단정해 보였다. 여자는 여럿 울렸을 법한 얼굴도, 쫙 차려진 정장과 길쭉하게 뻗은 다리는 능숙하게 꼬아 올린 채로, 마치 천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어딘가 호원을 공포감으로 서리게 만들었다. 자신과 절대 엮일 리 없는 이 남자는 어째서, 왜 날 찾은 거지?


 정확히 이곳으로 오게 된 건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야간근무로 잔뜩 지친 호원이 병원 입구를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력배처럼 생긴 곰남자 둘이 덥석 호원을 덮쳤다. 고함을 지를 새도 없이 입부터 틀어막고 명치를 때리고 기절시켰으니 저항을 할 틈은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니 센터의 이 남자의 사무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아직 비몽사몽한 호원에게 싱긋 미소를 짓고선 ‘우리 쪽 가이드로서 일해.’라며 부탁 아닌 명령, 협박의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그쪽 제대로 맺은 센티넬 하나 없을 텐데 우리 쪽 권유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시- 싫다니까요! 난 이제 별로 각인 같은 건 관심 없고...!”
 “흠... 싫다고 해도 이쪽도 내빼긴 어려운 입장인데.”


 이거. 어느 샌가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백화가 성큼성큼 다가와선 호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건 하나의 계약서였다. 호원이 단 한 번도 눈에 본 적이 없는. 이 가문의 가이드로서 센티넬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종이 계약서. 게다가 아래에는 호원의 이름과 본 적도 없는 지장이 찍혀져 있었다. “아, 참고로 이건 그쪽이 찍은 거거든.” 냉큼 호원의 손을 잡아 올리면 정말 엄지손가락에 본 적도 없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절한 사이에 멋대로 찍은 거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쪽..!”
 “경찰도 우리 쪽에 굽신대는 거 잘 알면서.”
 “...윽”
 “나쁜 제안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참고로 멋대로 계약을 파기할 시 벌금 1억이야.”
 “-!!!”


 그 커다란 돈을 어디서 구하라고....! 그러니까 하라는 말이지. 그는 세 번째로 만난 센티넬 영감보다 더 능구렁이 같았다. 한 번 덥석 물어서 놔주지 않으려는 독종!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글썽이는 호원을 즐겁게 내려다보며 백화라는 남자는 크게 웃었다.


 “뭐, 나쁜 제안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협박이잖아-!!!!’


 “게다가 그쪽 워낙 말도 많은 가이드라 다른 센티넬들은 거들떠도 안 봐주는 것 같은데. 다시 예쁨 받을 좋은 기회라고. 본가에 쫓겨나서 이도저도 못한 상황에 단칸방에서 지낸다며? 거기 집값 싸더만. 얼마 안 하던데.”
 “....뒷조사까지 하면서 날 가이드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뭐에요? 그만큼 아는 거면... 내가 이제까지 가이드로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다 알 텐데..”
 “알지 그럼.”


 알기 때문에 더 당신이 필요하단 거야. 훌쩍이는 호원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춘 남자는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례적으로 찾기 힘들다던 가이드 지수 200을 단순하게 뛰어넘어 버린 가이드지 그쪽. 듣자하니 214였던가? 하지만 지수가 높다고 다가 아니지. 단지 계약을 맺기 위했던 것만으로도 앞길이 창창한 센티넬을, 부유하던 센티넬을, 저속하지만 이용가치가 뛰어나던 센티넬을 전부 다 골로 보내버린 가이드. 붙기만 해도 저주가 달라붙는다며 센티넬이 극악적으로 기피하는 대상 1등.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상대를 죽여 버린다던 저주 받은 가이드. 차씨가문의 장남 차호원.”
 “.....”
 
 “그쪽이 꼭 맡아줘야 할 센티넬이 있어.” 고이 계약서를 접어다 호원의 손에 쥐어준 백화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으나 그 웃음이 가식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보다는 조금 더....


 “...그건 그쪽이에요?”
 “뭐? 나? 미쳤어? 난 죽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난 이미 계약된 가이드가 세 마리나 있어.”
 “....”


 완벽하게 가이드를 가축취급 하는구나. 호원은 인상을 콱 찌푸렸다. 그럼 대체 누군데요? 호원의 물음에 백화는 씩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 동생.”
 “....”


 .......?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호원을 내려다보며 백화는 훗, 하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선 다시 벌떡 일어나 긴 다리를 휘적대며 잠시 그 주위를 뱅뱅 돌다가 책상에 대충 걸터앉으면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서가 다가와 잔을 쥐어주었다. 그러곤 값비싸 보이는 양주의 뚜껑을 열어 익숙하게 그 잔을 가득 채워 넣으면 남자는 망설임 없이 쭈욱 양주를 들이키고선 입가에 흐르는 자국을 슥 손등으로 닦아 쿡쿡 웃었다. 붉게 빛나는 남자의 검붉은 눈동자는, 마치 광기에 서려있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아이러니한 일이지. 저주 받았다던 가이드를 내 손으로 직접 동생에게 선물해 준다는 건.” 그치만 이 방법밖엔 없잖아. 잔을 다시 채워주기도 전에 남자는 들고 있던 잔을 바닥으로 확 던져 깨트렸다. 쨍그랑 깨지는 유리조각들이 날아가 하나는 호원의 뺨을 재빠르게 그어냈다. 따가워! 주륵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손바닥으로 감싸며 호원이 작게 앓았다.

 “이렇게 하면 내 손을 쓰지 않고도 녀석이 저주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를 가이드로서 맡기는 이유가.... 동생을 죽이고 싶어선가요...?”

 어째서? 호원의 물음에 그저 씩 웃기만 한 백화는 글쎄. 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적어도 넌 그렇게 만들어 줄 거잖아.”

 ‘......아냐.’

 그럴 생각, 눈곱만큼도 없는데...



*  *  *


 “결국... 와버렸다...”

 덜렁 집주소가 든 종이와 상대 센티넬 얼굴이 찍혀 있는 사진 하나. 그리고 캐리어 하나와 함께 호원은 남자가 시키는 대로 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일단 월급도 제대로 지급되는 것 같고, 하지 않는다고 하면 벌금이 1억이니 발뺌을 할 수나 있을까... ‘제대로 저주하고 와줘!’ 라며 입에 침 하나 바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마치 싸이코패스 같았다. 정말로 저주내린 가이드가 가는 거라고요? 죽을 수도 있다고요? 형제 싸움 좀 살벌하게 하지 마시고요? 제 3자는 뭔 죄냐고요!

 ...라고 아무리 따져봤자 결국 호원은 을의 입장이니 소용이 없다. 결국 짐을 부랴부랴 싸고 남자네 집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의 이름은 주명. 나이는 호원과 같은 23살에 그 형에 그 동생인지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에 떡하니 저택 하나 짓고 사는 듯 했다. 그리고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사진의 얼굴에 호원은 끙 앓았다. 어디 가서 시선 확 끌어질 케이스야 이런 사람들은... 게다가 왼쪽 눈에 두른 안대가 특징이었으니 갑인 백화의 얼굴과 헷갈릴 이유는 없었다. 긴 머리도 아니었고, 곱슬기가 살짝 도는 남자의 까만 흑발도 조금씩 달라 보였다.
 그런데- 순순히 들여 주긴 할까? 딱봐도 수상한 차림새에 이름부터 들으면 질겁한 소문의 저주받은 가이드고. 이제껏의 경험들을 떠올리면 초면에 욕을 얻어 들어도 이상할 리 없는 상황이었다. ‘내 동생 내가 보냈다고 하면 과격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혹시 모르니 들어는 보라며 떠나기 전에 알려준 팁도 있었지만 정말 동네 깡패에 불과한 내용들뿐이었다.

 ..어쩌지. 남자가 알려준 주소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고. 우울함에 한숨만 푹푹 새어 나오지만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힘내자 차호원! 1억은 솔직히 주기 싫고 돈도 없잖아! (..) 이젠 내뺄 기력도 없어!

 “좋아, 빨리 가자-!” 아자아자!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쥔 호원이 확 걸음을 내딛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캐리어의 틈에 끼어 그대로 확 몸이 고꾸라져 엎어졌다. 커헉! 시멘트 바닥에 냅다 얼굴을 박고 엎어진 호원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아.. 뭘 제대로 하려고 하면 항상 이래...ㅠ!’


 “.....거기 뭐하냐?”
 “!”


 악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까지! 수치감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멀리서 멍! 하고 짓는 소리까지 들린 걸 보면 강아지도 있는 모양이었다. 터벅터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커졌다. 그냥 이대로 지나가주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호원이 조금씩 비틀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내민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땅에 그렇게 미련하게 엎어지면 코 깨진다.”
 “..아...”
 “허, 손 아프거든? 빨리 일어나.”
 “아, 감사합니다...”


 착한 사람이다... 부끄럽기는 해도 상대에게서 내밀어진 배려심에 코끝이 찡해졌다. (다른 의미로도 찡해진 것도 있지만.) 급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호원은 거리낌 없이 상대 남자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


 그건 마치 간지러운 정전기처럼 일어났다. 맞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쓰한 온기가 온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 만졌던 차가운 느낌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 느낌은 곧 사라지고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감정이 스며 들어왔다. 상대가 느껴왔던 웅축된 감정들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간 배워왔던 것 그대로 맞잡은 손 너머로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건 아주 당연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대를 진정시키는 마음을 불어 넣었다. 몇 초도 걸리지 않고, 상대도 능숙하게 기운을 받아냈다. 마치 빈잔이 덜렁 있는 듯한 남자의 속은 잔뜩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위험해.’


 어떻게 견뎌온 거지?



 “....그쪽.. 가이드...냐?”
 “.....아.”


 나도 모르게 그만! 급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호원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배려를 받은 상대 남자는 호원이 찾던, 백화가 가이드를 맡아주라던 센티넬이었다. 그는 이 행위가 조금 불쾌했던 모양인지 인상을 콱 찌푸리고 있었다. 생글생글거리며 능글맞게 웃던 형과는 다소 큰 차이를 보였다.


 이렇게 쉽게 찾게 될 줄이야. 사진과 똑같이 번지르르한 얼굴로 서있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주명이었다. 형과는 다르게 조금 밝은 빛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저 얼굴만으로 대면해서 만났더라면 그의 생김새에 중점을 두고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겠지만 호원은 마음이 급했다. 이 남자는, 당장이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는다면 언제 폭발할지 모를 위태로운 사람이야.


 문득 남자가 보자마자 하라던 팁이 떠올랐다. ...그걸 위해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상대의 상태가 이래서야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보기도 어려웠다. 호원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의 양심보단 계약서에 적혀 있던 1억이 더 컸다. 미안해요 주명씨! 그치만 이렇게라도 하면 어차피 가이드로 일할 거, 조금은 안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호원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쪽 멋대로 이러는 거 그만..-”


 덥석 멱살을 잡아다 끌어당긴 주명이란 남자는 무방비하게 호원의 앞으로 끌려왔다. 당황해 벌어진 입술로 호원의 입술이 겹쳤다. 놀란 주명의 붉은 두 눈동자가 번쩍 떠지며 커졌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닌 감정을 공유해 제어하기 위한 농밀한 행위였다. 서로에 대한 마음따윈, 하나도 없어도 뽀뽀도 키스도 섹스도 할 수 있다는 게 우습지.

 ‘이 사람이랑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선 멋대로 키스한 것부터 각인 확정이지만. 쪼오옥 소리가 날정도로 입술을 눌러 붙인 호원은 입술을 파고들어 고여있던 타액을 꿀꺽 삼켰다.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입안을 더듬어 서툴게나마 타액을 흘려보냈으니 간접적 각인 맺기는 성공한 셈이었다. 이렇게 쉬웠다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랑도 진작 해놓을 걸. 돈이란 건 참 애석한 존재였다.


 처음 만난 사이에 5분조차 지나지 않은 상대.
 저주를 뿌려 된다면 죽음으로 몰아달라던 형과 똑 닮은 남동생.
 저주받았다던 가이드인 차호원. 어딘가 위태로운 센티넬 주명.
 그렇게 각인은 맺어졌다.



 제대로 맺어졌어. 알 수 있어. 입술 가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손등으로 눌러 문지르며 호원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나른한 기분도, 기분 좋은 느낌도 들 리가 없지. 떨어진 상태로 조심스레 주명의 동태를 살폈다. 짧았지만 분명 원기는 불어 넣어 줬으니, 조금은 괜찮겠지 싶었다.

 “..이제 괜찮으세-”
 “무슨....”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짓이야-!!!!!!!!!!!???!!!!! 이 정신나간 놈이!!!!!!!!”
 “아악!!!!!”

 뻐억! 떨리던 주먹이 호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괜찮냐고 걱정해야 하는 건 이쪽이었구나! 몰려오는 현기증에 비틀대던 호원은 결국 다시 바닥에 엎어져야만 했다.
 처음으로 맺게 된 센티넬과의 첫만남이었다.










삘받다 쓰니까 오랜만에 만자 넘었다.. (코슥)

정작 주명이랑 만난 장면밖에 없어서.... 나중에 더 쓸 수 있어요....


주명 : 센티넬. 가이드 없음. (강제적으로 호원이랑 맺어진다..) 24년동안 형식적으로 가끔 손만 잡는 가이드만 만나옴. 정신력이 강하다... 무슨 능력인지는 앤오님이... (ㅈㄴ)


백화 : 센터의 젊은 중추 관리원.. 직급이 높다.. 돈도 많다.. 주명이 괴롭힌다.. (분노) 센티넬. 주명일 어떻게든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싶어하지만 제 손을 더럽히긴 싫을 것 같아.. (..) 그 말많던 가이드 호원을 배치시킨다. 1억으로 협박한다..


호원 : 저주받은 가이드. 센티넬 싫어한다. 그치만 1억 때문에 강제로 주명이랑 각인을 맺는다. 의외로 가이드 수치가 높다. (평균 100~150인데 호원은 214)


갑자기 센티넬버스가 땡겨서.. ㅠ..... 멋대로 설정 끄집어 캐붕시켜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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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호원/아심여칭 2017. 5. 17. 22:52

인간과 요괴 사이



 *아심여칭 엔딩 이후 몇 년 후.

 *자캐 해시태그로 요괴AU_가면축제에_요괴앤캐와_만나게_된다면 비슷한 해시를 봐서..

2017.02.18




 일본 여행의 묘미는 뭐다?


 먹거리. 덕후들의 천국. 온천 여행. 깨끗한 거리! 다양한 체험!


 "그리고 여자 기모노!!!!"

 "변태야 입 좀 다물어."


 으이구 내가 못말려. 흥분해있는 남자의 머리를 쥐어 박은 여성이 푹 한숨을 쉬었다. 마치 콩트 같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호원을 비롯한 남은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너희도 그만 좀 웃고!" 호원들에게 일침을 넣은 여성은 머리를 벅벅 긁는 남자를 무시하고 들고 있던 가면을 얼굴에다 끼워 썼다. 토끼가 그려져 있는 귀여운 모양의 가면이었다. 남은 묘미는 뭐겠어? 당연히 축제지 축제! 그녀의 말에 공감하듯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호원도 마찬가지였다.


 몇 없는 해외 여행의 기회는 막 대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때 찾아왔다. 곧 시험에 찌달릴 팀인데 마지막에 어디든 가봐야지! 센스있게 해외라던가! 그렇게 짜여진 선후배들과의 팀에 호원도 덜렁 끼워졌다. 정신을 차리면 이미 짐을 안고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눈을 감았다 뜨면 이미 일본 여행에 흠뻑 빠져 있었다. 오늘은 5박 6일 여행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이었다. 미리 잡아둔 숙소에서 실컷 온천 분위기를 띄우고 난 다음엔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왔다. 곧이어 쉬려는 후배들을 끌고 온 선배들은 기세등등하게 마을을 안내했고, 도착지는 이곳. 분위기는 잔뜩 띄워져 산만하고 즐거워 보였다.


 신사를 향한 계단을 올라서 쭉 걸어가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길 위에 하늘하늘한 등불들이 밤을 밝혔다. 주점들은 길가 사이로 자리를 잡아 저마다 가지각색 물건들을 팔아 넘기고 있었다. 와아, 신기해! 한국과는 거리가 멀지만 못지 않게 활발해 보이는 축제거리였다. 어때! 대단하지! 눈을 반짝이는 후배들을 두고 남자는 기세등등하게 마치 자기가 열은 것 마냥 콧등 아래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우쭐해 했다.


 "우리가 열심히 조사해서 마지막 숙소를 이곳 근처로 겨우 잡았지! 일년에 딱 한 번만 열리는 神様神様(신님신님)축제야!"

 "이 축제 이름인가요? 특이하네- 분명 카미가 뜻이 신...이었나?"


 잔뜩 신이 난 여자 동기가 환하게 웃으며 묻자 여자 선배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하며 들고 있던 가면 무더기들을 하나씩 쥐어주기 시작했다. 아키야마 현에서도 동떨어진 외곽쫀 산동네가 단 한 번 열리는 축제와 이야깃거리 때문에 수천만명의 사람이 이곳을 왔다갔다 하거든. 그녀 말대로 축제 거리들을 잔뜩 메운 인파들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 축제가 그렇게 유명해요?" 호원이 유카타 끈을 묶으며 물었다. 기모노가 정석과 동시에 묘미라고 말한 남자 선배와는 달리 그 값비싼 기모노를 사입진 못해 정작 유카타를 입은 호원들이었다. 그것도 근처 숙소에서 내준 싸구려 유카타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지? 민무늬인 하얀색 유카타엔 허리에 검은색 끈이 묶어진 게 전부였다. 제대로 묶지 않으면 다리 사이가 쩍 갈라져서 변태로 보일 걸. 옆 친구가 호원의 옆구리를 쳐대며 킬킬댔다. 다리까지 내려오는 유카타의 천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내는 호원의 손놀림을 결국 보다 못한 동기가 대신 묶어주고 나서야 깔끔한 옷차림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다보던 여자 선배는 입 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말해줄까?


 "나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알아낸 건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이 축제의 시초가 하느님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 만든거라네."

 "아, 그래서 신사 근처가 축제장터구나!"


 뭔가 신기하네! 여자들끼리 얼굴을 모아 마주대며 꺄르륵 웃어댔다.


 "일년에 단 한 번 뿐인 이 날에만 땅에 있는 인간과 하늘에 있는 신들과 요괴들이 모일 수 있었고, 그것을 기리는 행사가 오늘이라네!"

 "우와- 요괴래!"

 "뭔가 그럴싸 하네요 ㅋㅋㅋ"

 "그치? 그래서 카미사마 축제엔 규칙도 있지."


 ....요괴와 신. 어색하지 않은 단어를 떠올리며 호원이 눈꺼풀을 깜빡였다. 단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아주 귀중한 날.


 그리고 규칙..? 웅얼대는 호원에게 냉큼 그 사이를 끼어든 남자 선배가 가면을 얼굴에 덧씌웠다. 꾸엑! 괴상한 소리를 내자 주변 동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가면을 쓰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


 가, 가면-?! 작은 숨을 터트린 호원이 허겁지겁 덧씌워진 가면을 확인했다. 주황빛 줄무늬가 그어진 여우가 그려진 가면이었다. 그와 별개로 여러 동물이나 괴물 모양을 띈 가면들이 하나둘씩 동기들의 손에 쥐어졌다. 자, 다들 제대로 끼고 돌아다녀- 이게 규칙이니까. 강아지 모양의 가면을 쓴 남자 선배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종족이 만날 수 있게 된 대신 하느님이 하나의 조건을 다셨다고 해, 그러니까- 축제 이야기에서 말야. 서로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덧씌우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거야."

 "아하하! 전래동화같다 그거-!"


 옆 친구가 배를 잡고 웃어대는 틈에 호원은 조심스레 여우 가면을 얼굴에 씌웠다. 답답하지만 눈부위는 제대로 뚫려 있어 앞 시야는 볼 수 있었다. 그럼, 만약 얼굴이랑 이름을 알려주게 되면 어떻게 돼요-!? 이미 이야기에 흠뻑 빠진 듯 한 여자동기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으쓱이는 남자 선배를 두고 여자 선배가 가볍게 대답했다.


 "종족이 다른 상대의 얼굴을 보면 평생 그 얼굴을 잊을 수 없게 돼."

 "그리고 신이나 요괴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그 존재는 다시 하늘에 올라가게 되고, 반대로 인간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강아지 가면을 쓴 남자와 토끼 가면을 쓴 여자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핏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부른 상대와 함께 하늘로 끌려가게 된다네?"

 "끄엑, 완전 불리한 건 인간이네!"

 "뭐- 신이나 요괴를 비교하면 인간이 갑을의 을이잖아 을..."


 "라고 해도- 그냥 옛날부터 내려오던 축제 이야기일 뿐이고 믿는 사람은 믿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대로 축제를 즐겨야지 뭐!" 그래도 다들 가면은 제대로 쓰고 다녀야 한다? 두 선배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쭈뼛쭈뼛 가면의 끈을 묶고 있는 호원에게 냉큼 손가락을 내밀며 이마를 툭, 때렸다. 가면에 눌린 이마가 약간 아팠다. 틈을 파고든 선배가 단호한 얼굴로 호원에게 넌지시 경고를 던졌다 그리고 하나 더.


 "인파 장난 아니니까 절대 혼자 헤매고 다니지 말 것! 특히 차후배!"

 "....;; 네에....."


 조심할게요.... 작게 웅얼대는 호원의 대답해 토끼 가면을 쓴 그녀가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댔다.





*  *  *




 절대...

 헤매고 다니지 말 것!

 특히 차후배!



 ...라고 했던게 한 ... 30분 전인가?


 "다, 다들 어디로 간 거야......"


 이거 그거야? 또 불행루트? 호원은 잔뜩 울상인 얼굴로 거리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 사이에 잔뜩 부대껴서 비틀대는 몸을 겨우 유지하며 말이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시야 안엔 같은 유카타를 입은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 잃어버리지 말라며 한 동기가 잡아주고 있었는데 사람들 홍수에 쏠리고- 쏠리다보니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나, 난 이제 뒤졌다... 주르륵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유카타를 잡아 올리기도 전에 호원이 훌쩍거렸다.


 하필이면 한국도 아니라서 그런지 괜시리 걱정이 된다. 그냥 돌아가서 숙소에 자리를 잡아둘까? 핸드폰도 흘려버릴 까봐 안 가져왔는데... 겨우 쥐고 있는 건 돈 몇 푼을 담아둔 지갑이었다. 그래도 뭐처럼 온 축제인데, 한 번 밖에 없는 하느님 축제! 뭐라도 좀 즐겨볼까 싶어도 혼자서 뭘 즐긴단 말인가. 귓가에는 알지 못하는 일본어들이 윙윙대며 울렸다. 몸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흔들렸다. 으윽, 사람 멀미... 창백해진 호원이 제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아아, 내가 하는 게 늘 그렇지 뭐.


 '돌아.. 돌아가서 천천히 찾아보자..'


 우선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괴로워... 호원은 어색한 일본어를 입에 담으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 스미마센- 스미마센..! 하필이면 있는 장소가 또 가장 인파가 많은 장소인지라 한 걸음 걸음 내딛기가 불편했다. -끄응...! 진한 담배 냄새가 나는 아저씨 옆을 지나가는 사이에 호원은 들고 있던 지갑을 툭, 떨어트렸다. 아! 아차 하는 사이에 하나 둘씩 사람들이 호원의 검은색 지갑을 밟기 시작했다. 으아아, 안돼..! 기겁한 그가 급하게 걸음을 내딛는 사이 순간적으로 옆을 애워싸던 인파들이 팟, 지나갔다. 간신히 옮기던 스텝이 엉키고 호원의 발목이 꺾였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왁!"


 쾅! 소리를 내며 몸이 앞으로 쏠려 엎어졌고, 엉성하게 묶어 쓰고 있던 가면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아파! 쪽팔려! 호원이 넘어져도 나몰라라 지나가는 인파에 찔끔 그가 눈물을 흘렸다. 호원을 사이로 방방 뛰어대던 가면 소년소녀들이 꺄르르륵 웃어대며 그를 지나쳐갔다.


 "あははっはっ!!!! ばかばか! (아하하! 바보바보!)"

 '아.. 저거 분명 나 놀리는 거다...!'


 언어는 몰라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젠장...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호원이 꾹 주먹을 쥐었다. 다행히 지갑은 호원의 눈앞에 있었다. 호원은 눈앞에 떨궈진 지갑을 향해 겨우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가로막듯 위로 뻗은 새로운 손의 주인에 잠시 멈칫 했던게 흠이지만.


 ".....?"

 "....."

 "..아,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아- 아리가토 고자이마수.....?"


 '나랑 같은 가면이다....' 코까지 덧씌워 가려진 여우 가면엔 주황색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호원과 마찬가지로 검은 흑발과 어울리는 남색 기모노는 어깨 위까지 소매가 걷어져 올려 있었다. 매끈하게 뻗어진 팔과 손은 모두 호원에게 향해 있었다. 치, 친절한 사람이다... 타지에서 느끼는 친절함에 찌잉 가슴이 울린 호원이 조심조심 상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가볍게 남자의 손으로 몸을 일으킨 호원이 탈탈 옷을 털어내는 사이 남자는 다시 한 번 더 호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남자와 똑같은 여우 가면을 쥔 채로 말이다. 호원이 조금 전 떨어트린 가면이었다.


 "우와...! 내 가면! 아, 리가토 고자이마-"

 "너가 왜....."

 ".....?"


 남자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능숙한 한국어였다. 아, 한국어다! 같은 한국인인가?! 같은 동양인인데다 가면까지 쓴 상황에 상대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는데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어디 있겠는가. 호원은 서툰 일본어 대신 냉큼 한국어로 감사의 인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데자뷰마냥 남자가 가지고 있던 여우가면을 호원에게 덧씌우긴 전까지! 다시 꾸엑-! 소리를 토해낸 호원이 다급하게 가면을 붙잡고 낑낑댔다.


 "커헉, 가- 가면 누르지 마셉.. 숨막협.."

 "....찌질해."

 "-?!"


 하다하다 초면인 사람한테 찌질하다고 들었어!


 "가면, 제대로."

 "아-....."


 맞아, 축제 땐 가면을 제대로 써야 하는 게 규칙이었지... 허겁지겁 남자에게 가면을 받아다 호원이 급하게 끈을 묶기 시작했다. 그 엉성한 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도로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다 다시 손에 꽉 쥐어다주었다. 잃어버리지 마. 남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 고마워요... 근데 반말...? 


 "아- 하하하... 죄송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제가 동행인을 잃어버려서."

 ".....그거 우연이네."


 나도 잃어버렸거든. 멋대로 끌고왔던 녀석들이 멋대로 사라져버려서. 으쓱 어깨를 흔들던 여우 가면 남자를 바라 보던 호원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 둘다 똑같네요! 남자는 호원을 따라 미소짓다가 이내 확 얼굴을 굳혔다. 쓱 내려간 입 꼬리만 봐도 얼추 예상이 갔다.


 "그렇다고 너처럼 띨띨하진 않고."

 "아...하하, 하............... (이 인간이...)"


 뭐야, 이 엄청난 무례함은... 우리 초면인데...??? 가까스로 그가 꺼낸 친절함을 떠올리며 분노를 억눌렀다. 후우- 가볍게 숨을 들이쉬던 호원에게 남자는 슥 세 번째의 손을 내밀었다. 


 "가자."

 ".....???"

 "서로 사람 잃어버린 동지끼리 이용해야지."


 안 그래?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못한 호원이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그래야지. 여우 가면 남자는 조금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사그라지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인파를 파고 헤치며 호원은 그저 자신과 닮은 검은 흑발의 남자를 뒤따라갔다. 어떨떨결에 같이 가게 됐는데.... 괜찮..겠지? 의문감이 새록새록 피어가는 가운데 자신과 똑같은 여우 가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


 엄청 부드럽고, 낯이 익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어느새 넓은 축제 장터가 호원과 여우 가면의 남성을 맞이하고 있었다. 형형색색 빛나는 수많은 등불들이 호원의 눈을 밝혔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경계 틈 사이에 유일하게 허락해 놓았던 만남의 장소. 호원과 남자가 발을 딛은 이곳이었다.





*  *  *




 "으하하, 최고였어~!!"

 "...;;"


 조금 지쳐 보인 듯한 남자 뒤로 호원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낚아 올렸던 몇 마리의 물고기들과 풍선, 장난감들. 그리고 호원 손에는 단 간식들과 사과사탕, 초콜릿을 듬뿍 발라놓은 바나나가 걸려 있었다. 남자와 함께 어울린 시간은 짜릿한 놀이세상이었다.


 만화책에서만 보았던 물고기 낚기! 처음에 둘이서 흠뻑 빠져다 정신없이 물고기를 낚아올렸고 서너 마리를 얻었다. 각자 두 마리씩 물고기를 쥐고 난 후에는 먹거리 파티였다. 다만 단 거에는 미숙했던 모양인지 단 곳만 찾아대던 호원을 낚아챈 여우 가면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거니 말거니! 호원은 남자의 손목을 낚아채고 질질 끌고다니며 장터를 돌아다녔다. 초코 바나나! 링고사탕! 화과자! 타코야키! 오징어구이! 과자! 꾸역꾸역 먹을거리를 입안에 밀어 넣는 통해 남자는 점점 더 질린 얼굴로(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호원을 응시했다. 느낌상 돼지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없는 돈을 다 털어가며 먹어댈 기세라 결국 보다 못한 남자가 호원을 이끌고 다른 길로 샜다. 인파들 없는 쪽으로. 산쪽 들가쪽은 인파가 적어 보였다. 조금 더 돌아다녀도 될 것 같은데...! 혼자 계속 있던지. .....

 결국 여우 가면 남자를 따라 들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곽쪽으로 길을 빠져나간 탓인지 어깨를 부딪혀대던 인파들도 사그라져 이따금 길가를 걷는 몇몇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축제 거리판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은 호원이 와- 탄성을 토해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도 조용히 그 옆을 따라 앉았다.


 "아하하, 이래서 일본 축제는 꼭 와보라고 하나봐- 엄청 재미있었어. 그지!"

 "...놀다가 먹기만 한 기분이지만."

 "에헤헤."


 여전히 오른손엔 사탕을 쥐고선 웃는 꼴을 보며 주명이 질색했다. 그 모습을 놀거리 삼아 호원이 낄낄 웃었다.


 "하하, 그래도 정말 즐거웠어! 혼자면 어쩔까 했는데... 같은 한국인이여서 그런지, 무섭지도 않고!"

 "...."

 "아, 그러고보니 못 물었는데- 그쪽 이름! 나는 차.."

 "알려주면 안 되잖아."


 호원의 말을 가로 막은 남자는 머리 뒤로 팔을 두르며 들판에 등을 기대 누웠다. 규칙, 잊었어? 나긋한 그 목소리에 잠시 말문이 막힌 호원은 곧이어 조금 전 선배들이 장난거리 삼아 꺼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냈다. 신이 만들어 낸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만남. 신과 요괴와 인간. 그들만이 정한 규칙.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호원이 곧 여우 가면을 응시했다. 


 "여- 여우씨도 그런 걸 믿어요?"

 ".....그럼 이상해?"

 "딱,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다들 장난으로 받아들이니까. 그냥 흘러가는 이야깃거리로 듣잖아요.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을 맞아가며 호원이 찔끔 눈을 감았다가 게슴츠레 떴다. 뻥뻥 뚫린 유카타 사이로 스멀스멀 바람이 스며 들어갔다. 찬기운에 살짝 몸을 떨다가도 이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호원은 남자를 따라 들판에 몸을 기댔다. 콕,콕 등을 찌르는 잔디 감촉에 웃음이 나왔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지.


 "나만 믿는 줄 알아서...."

 "....그쪽도 다를 거 없구만."

 "하하, 그렇죠-? 으음... 하느님이 단 하루뿐이라도 이런 기회를 안겨준게, 참 감사한 일이잖아요."


 평생 만날 리 없는 신과 요괴의 경계를 하루만이라도 열어줬는데 얼마나 고마워? 옷소매를 걷어올리며 손에 쥔 사탕을 아그작 아그작 호원이 씹어댔다. 달콤한 사과조각 사탕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여우 가면을 쓴 남자는 그런 호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고마워? 서로가 누군지 알 수도 없게 만들어놨잖아. 벌칙은 또 엄청나고. 난 싫던데."

 "그래도 만나는 게 어디에요? 인간이 뭐-! 어? 신이나 요괴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그리고, 서로를 알지 못해도 아무렴 뭐 어때. 등불에 밝혀 저 멀리 환하게 빛나는 축제 장터를 내다보며 호원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도 같은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면 기쁠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욕심이 큰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같은 장소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요.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괴상한 호원의 말에 말문이 막힌 걸지도 모른다. 하기사, 호원의 사정을 알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일 투성일 텐데 초면에 마음 넓게 이해해 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같은 순간에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호원은 눈을 감았다.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이야기였다. 


 산골 깊은 외곽쪽이라서 그런지 등불 위에 잔잔히 별이 박힌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세기도 어려운 밤하늘 별숫자를 헤아려 보다가도 그 멀리 자리잡고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호원은 눈을 감았다. 


 흐릿하게 자리잡은 꿈속의 사람이 있었다. 남들은 허상일 뿐이라며 쉬쉬할 이야기들 뿐이겠지만, 남자에겐 현실에서보단 더 특이하고 특별했던 짧았던 기간. 꿈처럼 몽롱해지는 기억들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털털하지만 말끔하던 모습과 화를 내도 마지못해 웃어보이던 네 얼굴이 웅덩이에 던져 놓은 돌멩이마냥 몽롱해져서, 점점 더 잊어져만 가는 내 자신이 싫었다. 수없이 되짚고 수없이 떠올리며 수없이 말해가도 꿈의 조각은 점점 더 바닥에 떨어져만가서.


 "그러니까.. 이렇게 같은 순간에 서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내지 않을까 싶어서.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호원이 웃었다. 


 선배들이 꺼낸 이야깃거리는 마치 신이 내린 선물인 양 들려왔다. 가면으로 가려버린 얼굴 너머로 몇 번이나 되씹고 되씹었던 이름 하나.  신이 내린 단 하루만의 선물. 밤하늘과 젖은 땅의 길에 이어 놓은 다리 끝자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어떻게든 기억해내고 싶어서. 한 번만이라도 다시 나타나줬으면 해서.


 "....만나고 싶었거든요. 그 하늘에 있다는 사람 아닌 상대를..."

 "이름이 뭔데?"

 "아, 이름은- 주명..."


 엉성하게 묶여져 있던 가면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풀렸다. 아, 가면.. 시선을 내리까는 사이 호원이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굳게 가려져 있던 여우 가면 남자의 가면도 벗겨져 있었다.


 "멍청아."


 규칙을 알아도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니 어쩌려고 그래. 약간 다그치는 듯한 거친 목소리. 호원이 생각했던 그대로의 부드럽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동공이 떨리고 눈이 크게 떠졌다.


 "넌 옛날부터 그랬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았던 붕대를 감고 있지 않았다는 것. 벗고 왔나보다. 대신 살짝 잔흉터가 남은 왼쪽 눈을 꾹 내리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못알아본 건 아니다. 강렬하게 빛내는 붉은 눈이 호원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반사적으로 고였던 눈물이 뚝, 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옅게 느껴지는 목재향이, 손짓이, 행동이, 말투가 이제 서야 하나 하나 되돌아오는 것처럼.


 아아,

 아아아.


 그래 너는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투로 나를


 줄곧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작고 작던 기억의 조각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하나님께서 정해주는 단 하루의 시간, 엇갈린 두 존재의 시간이 맞물려졌다.

 아주 잠깐이라도, 조금이라도, 적게나마 너와 만났다.


 꿈이 아니라.


 "주-.."

 "바보야."


 난생 처음 본 맨얼굴로, 난생 처음 본 슬픈 표정을 지으며


 너와 처음으로 꿈밖에서 재회했어.


 "다음엔 제대로 기억해 차호원." 그렇게 마지막 인사마냥 말을 건넨 남자의 모습은 바람과 함께 휘날려 사라져갔다.


 인사를 할 기회따윈, 단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아담과 이브에게 자비가 없던 하느님은 그들의 자식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  *  *




 눈치 챘으면서. 바로 나란걸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랑 놀면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렸던 이유가 뭐야?



 "차후배! 괜찮아?! 너 없어져서 난리도 아니였어!"


 그러게 길조심 하라니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들이 허겁지겁 호원을 찾아왔다. 이런 외간 곳에 혼자 남아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도 못 찾지! 여러 가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밀며 호원을 살폈다.


 호원은 외딴 곳에서 길을 잃고 꽤 많이 겁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눈물자국이 뺨을 타고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벌겋게 충열된 양 눈이 퉁퉁 불어있었다. 주먹을 꾹 쥐며 한 곳만 일직선으로 응시하는 호원을 바라보며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떡해, 많이 무서웠나봐. 괜스레 미안해진 마음에 하나 둘씩 사람들이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 호원아...? 많이 무서웠니?"

 ".......처음으로..."


 막힌 숨을 토해내듯 꺼낸 호원의 목소리는 가득 먹혀 거칠어져 있었다.


 "처음으로, 끌려가서 죽어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렸어요."

 "뭐...?"

 "규칙을 어긴 벌이여도 좋으니까...."


 조금만, 욕심 내줘도 좋으니 데려가주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히끅대며 서럽게 우는 호원의 속을 알 리가 없는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힐끔힐끔 볼 뿐이었다.


 꿈처럼 덧없이 빨리 지나가버린 너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이별의 길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네 얼굴과 목소리와 함께.

 가슴 아래에 남아버렸다.









 꿈마냥 벌여졌던 아심여칭의 이야기니

군데군데 기억이 없어지거나 목소리도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있는거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다 기억하고 싶지만..)

뚜렷하게 기억남은 건 같이 했던 일과 주명의 이름... 이지 않을까 싶고..

아 쓰니까 슬퍼지네요 제길..

더 길게 쓰고 싶어졌는데 시간이랑 촉박해져서.. 죄송합니다.

주명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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