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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하라 / 바다를 사랑한 소년
2015.12.25
눈이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알맹이들을 올려다보며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공중에 떠다니는 허한 김이 떨어졌다. 올 해 겨울은 작년보다 빨리 시작됐다. 하늘에서 막 떨어지는 눈의 절경에 바다꾼들이 저마다 들고 있던 짐을 놓고 절경을 감상했다. 반짝이는 눈들이 마치 바다를 축복해주는 것 같구나. 드넓은 푸른 바다에 새하얀 솜들이 흩뿌려지니 이보다 더한 아름다운 풍경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차가운 겨울바다의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시온은 커다란 나무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눈에 보이는 진풍경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입 꼬리를 올렸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곳에는 우수함을 집착한 소년과 속을 알 수 없는 소년의 숙제를 끝내기 위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작은 우연은 큰 운명을 만들어 낸다더니, 바다에 향하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새로운 길을 터주었다. 바다와 어울리는 청년과 손을 잡고 바다까지 길을 향했다. 그때도 지평선까지 파란 바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던 것 같다. 노란 눈을 반짝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 곧 고개를 옆으로 돌려 동급생인 제 동료에게 말을 걸 생각이었다.
늘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정 없는 눈을 마주하며 내 기분에 대해 혼자 떠들 생각이었다.
‘-’
엣취! 쿨럭 거리는 기침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떠오르던 추억들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코 아래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앓고 있는 이야츠다가 눈에 들어왔다. 민소매에 얇아 보이는 바지를 하고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한 겨울에 당당하게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니 안 추울 리가 있을꼬. 시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이 지나도 이야츠다는 제 몸에 대해 깊이 신경을 쓸 생각이 없어보였다.
시온은 제 목에 길게 걸쳐져 있던 두꺼운 천을 벗어냈다. 짧은 도약으로 이야츠다가 앉아있던 나무에게로 옮겨갔다. 시온? 코를 비비고 있던 이야츠다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기 전에 그의 훤히 드러나는 목에 두꺼운 천을 둘러주었다.
“안 추워? 아무리 우수해도 그렇지, 그러다간 동상걸려.”
“난 괜찮아입니다.”
“기침하면서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
입가까지 둘둘 싸매주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좋아, 끝. 가볍게 손을 털어내고 옆에 있던 두꺼운 나무줄기 위에 발을 얹었다. 살짝 흔들린 나무줄기는 곧 시온의 무게를 버티고 중심을 잡아냈다. 나뭇가지에 손을 얹으며 이야츠다를 향해 살짝 웃었다. 눈이 마주친 이야츠다도 동공이 살짝 커지더니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옛날이라면 좀처럼 볼 수 없던 얼굴이다.
“참 많이 변했어.”
“누구?입니다.”
“누구겠어. 내 옆에 있는 니사하라 이야츠다라는 녀석이지.”
“별로 그렇게..”
“변했어.”
단호하게 말하면 이야츠다의 입이 다물어졌다. 반박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그 모습에 시온은 다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옛날 생각에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때의 니사하라 이야츠다는, 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와 함께한지 약 2년째 되던 날. 당시의 시온은 그의 얼굴에 씌어져 있는 가면과 속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서로의 관찰일기를 쓰게 한 지도 약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우수함을 집착했던 나머지 얼른 들추어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함께 바다에 갔던 날. 어쩌면 처음으로, 새로운 얼굴을 보았을지도 몰랐던 날.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이.
여전히 입가는 굳은 듯 다물어지고 있었지만 가까이 서있던 시온에게는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눈의 색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향한 이야츠다의 눈빛이 밝은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저 얼굴은- 바다를 담은 너의 그 시선은-
분명 단 하나의 열망이었다.
“분명 바다잡이가 된 이유도 그때 그 일이었을 지도..”
“시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입니다.”
“너 알아듣지 말라고 하는 소리였어.”
허리를 숙여 앉아있는 이야츠다의 머리카락에 작게 키스했다. 그러면 제 손을 살짝 잡아당긴 이야츠다가 그 손등에 짧게 입 맞췄다. 오랜만에 만난 한 연인의 소소한 애정표현이었다. 손등에 닿은 입술이 떨어지면 시온이 얼굴을 붉히며 제 손등을 문질렀다. 제가 하는 건 익숙했지만 그에게 받는 애정은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래서-입니다. 시온.”
“아? 뭔데.”
“변한 내가 싫은 거야?입니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껌뻑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이야츠다만 응시했다. 옆모습만 보인 탓에 그가 무슨 얼굴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난히 귓불이 빨갛다. 그제 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바다를 보았다. 얼마만큼 뻗어 있는지 모를 넓고 푸른 바다를. 자신은 늘 이리저리 쏘아대는 통에 바다보단 육지를 더 많이 보고는 하지만 이야츠다는 다르다. 육지를 보는 것보다 바다를 더 눈에 담는다. 그 이름으로도 유명한 해군. 바다와 삶을 함께한다는 바다의 남자.
이야츠다는 바다에 있을 때와 육지에 있을 때의 얼굴이 다르다.
“..싫지 않아.”
나는 바다를 보던 너의 눈빛에 매료되었었으니까.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이야츠다의 표정이 부루퉁해 보였다. 씩 입 꼬리만 올리며 가볍게 몸을 내던졌다. 쑥 떨어지는 몸을 가볍게 착지하고 등을 곧게 폈다. 아름다운 경치를 더 눈에 담고 싶었으나 시간은 늘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는 거야?”
“응. 스승님이랑 만나기로 한 날이 아슬아슬하게 다가오고 있어서.”
“이번엔 꽤 빨리 가네~입니다.”
“아쉬워하지 마. 다음에도 올 거니까.”
편지 붙일게. 구석에 밀려 있던 제 짐을 꾸리고 등에 맸다. 언제 나무에 내려온 건지 뒤에서 꾸물거리며 따라오는 이야츠다가 보였다. 너도 바쁘잖아. 가야지. 눈을 구경했던 바닷사람들이 부랴부랴 짐을 가지고 옮기고 있던 것을 눈에 담았던 터라 슬슬이라고 생각했다. 늘 시온이 오면 시간이 여유롭다고 거짓말을 하며 제 일을 미루고는 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속는 척 넘어갔다. 하지만 나름 대장 직을 맡고 있는 그가 계속 시온이 올 때마다 일을 미루면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시온은 바다에게 이야츠다를 양보하기로 했다. 제가 찾아올 때마다 제대로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바다에게 감사했다.
“갈게, 이야츠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야츠다는 긴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꼭 와,입니다.”
“응.”
“다치지 말고,입니다.”
“너도 다치면 안 돼.”
“우수한 만큼..”
“우수한 만큼.”
“살아있어 줘.입니다.”
“살아있어 줘. 이야츠다.”
우리는 결코 안전하게 지낼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닌자인 나는 언제 전장에서 죽을지 모르고, 해군인 너 또한 언제 해적에게 목숨을 위협 받을지 모른다. 죽지 않는다고 몸이 건재할지 또 누가 알까. 서로의 이마를 맞대며 사랑을 속삭였다. 다음번에 만날 때 서로가 살아있길 빌었다. 헤어짐이 이별이 아니길 바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야츠다, 늘 네 곁에 없는 나를 용서해.
그에게서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고 손을 흔들었다. 이야츠다도 가만히 서서 시온이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 헤어지기 싫다. 본심을 삼키며 몸을 옮겼다. 그의 옆에 있기엔 나 자신이 아직 용납되지 않는다. 아직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부디 바다 옆에서. 네가 좋아하는 바다를 맘껏 눈에 담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시온은 마지막을 한 번만 다시 몸을 돌렸다. 보석 조각 같은 어여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했다. 나를 향해 보여주는 그 눈짓은 예전에 처음으로 바다를 눈에 담았던 너의 눈짓과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같았다. 그 눈을 담아 볼 때마다 작지만 강한 행복을 느꼈다.
“이야츠다.”
“...?”
눈이 내렸다.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섞인 눈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있는 너 또한
“바다를 사랑하는 너를 사랑해.”
아름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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